프롤로그

소하는 신이 컸다.
어머니가 다음 해까지 신으라고 큰 것을 사줬다. 마당까지 오는 동안 두 번 벗겨져서, 줄에 설 때는 발가락을 오그려 신 안쪽을 붙잡고 있었다. 오늘은 벗겨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적는 날은 해가 뜨기 전에 시작한다. 은포의 마당은 시장 옆이라 새벽부터 생선 비린내가 넘어왔다. 아홉 살이 되는 해에는 누구든 이 마당에 한 번 서야 한다. 그해는 스물세 명이었다.
소하는 스물세 번째였다.
줄 맨 끝에서 보면 마당이 다 보인다. 가운데에 낮은 단이 있고 그 위에 놋그릇 하나, 마른 나뭇가지 한 단, 물 한 사발이 놓여 있다. 단 앞에 기록관이 앉아 먹을 갈고 있었다. 소하가 아는 어른 중에 손이 제일 깨끗한 사람이었다.
뒤쪽 그늘에는 계(契)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매듭계, 뼈계, 소리계, 흔적계, 녹계. 저마다 다른 색 띠를 어깨에 걸치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소하는 어머니에게 저 사람들이 뭐 하러 오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사람 사러 온다."
"사람을 사요?"
"좋은 게 나오면 그 자리에서 값을 부른다. 선금이 나와."
어머니는 그 말을 하면서 손을 앞치마에 닦았다. 어머니 손은 손등이 갈라져 있다. 남의 집 빨래를 하면 겨울에 그렇게 된다. 소하는 그때부터 값이 나가는 속성이 나오기를 바랐다. 뭐가 값이 나가는지도 모르면서 바랐다.
"첫째."
첫 아이가 단에 올랐다. 손을 펴고 기다렸다. 배우는 것이 아니다. 아홉 살이 되면 세상이 그 아이를 알아보고 알아본 표를 남긴다. 아이가 할 일은 서 있는 것뿐이다.
놋그릇이 검어졌다. 테두리부터 안쪽으로 물이 스미듯 번졌다. 아이가 손을 떼기도 전에 그릇은 손톱으로 긁으면 부스러질 것처럼 됐다.
기록관이 붓을 들었다. "녹."
마당이 조용해졌다. 녹계 사람이 천천히 일어나 앞으로 나왔다. 값을 부르지는 않았다. 그냥 아이 옆에 서기만 했다.
아이 어머니는 고개를 숙였다. 축하하는 소리는 없었다.
소하는 그 아이 얼굴을 봤다. 아이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소하도 몰랐다. 다만 마당이 조용해지는 것으로 그게 나쁜 쪽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다음은 두리였다.
두리는 소하와 같은 골목에 산다. 어제 저녁에도 담 밑에서 같이 앉아 있었다. 두리는 소리가 나오면 좋겠다고 했다. 소리꾼은 시장에서 값을 부르는 일을 하는데, 하루에 두 번 목만 쓰고 삯을 받는다고 했다.
두리가 단에 오르다 발을 헛디뎠다.
넘어지지는 않았다. 무릎이 딱 소리를 내며 굳었고, 두리는 이상한 자세로 멈춘 채 자기 다리를 내려다봤다.
"뼈."
뒤쪽에서 사람이 벌떡 일어섰다. 뼈계 띠를 걸친 사람이었다. 그가 앉은 자리에서 바로 값을 불렀다. 기록관이 손을 들어 막았다. "적기 전에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마당이 웅성거렸다. 두리 아버지가 사람들 사이에서 앞으로 나오다가 주저앉았다. 앉은 채로 웃고 있었다. 소하는 어른이 그렇게 웃는 걸 처음 봤다.
두리가 단에서 내려와 소하 옆을 지나갔다. 아직 무릎이 안 풀려서 절뚝였다.
"소하야." 두리가 말했다. "나 뼈래."
"들었어."
"너도 좋은 거 나와라."
소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기 손을 봤다. 아까부터 손바닥에 땀이 나 있었다.
그 뒤로 아침이 지나갔다. 마른 나뭇가지에서 싹이 한꺼번에 올라온 아이가 있었고(씨), 단에 올라선 순간 마당의 소리가 전부 없어진 아이가 있었다(소리). 소리가 돌아왔을 때 소리계 사람은 이미 서 있었다.
일곱 번째 아이 때는 마당의 그림자가 한꺼번에 방향을 틀었다. 해는 그대로 있었다. 스물세 개의 그림자와 계 사람들의 그림자와 담장의 그림자가 모두 그 아이 쪽으로 한 뼘씩 기울었다가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아이 자기 그림자만 조금 어긋난 채였다.
기록관의 붓이 잠깐 멈췄다. "그림자."
여러 계가 동시에 일어섰다가 서로 눈치를 보고 다시 앉았다. 그림자는 어느 한 계의 것이 아니라 관에서 따로 보는 속성이었다.
흔적이 둘, 매듭이 하나, 숨이 하나. 향은 없었고 이름은 당연히 없었다. 이름은 십수 년에 하나 나오고, 나오면 그날 관에서 사람이 온다.
줄이 줄어드는 동안 소하는 뭐가 나오면 좋을지 계속 골랐다. 매듭이면 두 냥짜리 일을 한다고 들었다. 뼈면 두리 아버지처럼 어머니가 웃을 것이다. 녹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려 했는데 그건 잘 안 됐다. 아까 그 아이 어머니가 고개를 숙이던 것이 계속 생각났다.
"스물셋."
소하는 단에 올랐다. 발가락을 오그려 신을 붙잡고 올랐다.
손을 펴고 기다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
놋그릇은 검어지지 않았고 나뭇가지는 나뭇가지였다. 물은 흔들리지 않았다. 소리도 그대로여서, 시장에서 누가 값을 흥정하는 소리까지 다 들렸다. 소하는 손을 조금 더 펴봤다. 손가락을 벌리면 잘 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했다.
기록관이 기다렸다. 아이들은 대개 열을 셀 사이에 드러난다.
소하도 셌다. 하나, 둘, 셋. 열까지 세고 나서 다시 하나부터 셌다. 두 번째 열을 셀 때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록관은 서른까지 셌다. 그리고 예순까지 셌다.
뒤쪽에서 누가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소하는 어머니를 찾으려고 고개를 돌리려다가, 돌리면 안 되는 것 같아서 그냥 앞을 봤다.
"…적겠습니다." 기록관이 붓을 들었다.
붓이 종이에 닿지 않았다.
그는 손을 내렸다. 분명히 내렸다. 붓끝이 종이에 놓이는 것을 눈으로 봤는데 먹이 묻지 않았다. 다시 내렸다. 또 묻지 않았다. 종이와 붓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 아무것도 없는 것이 두꺼웠다.
기록관은 붓을 바꿨다. 두 번째 붓도 같았다. 그가 소하를 한 번 올려다봤다. 소하는 그 눈을 보고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걸 알았다. 무슨 잘못인지는 몰랐다.
세 번째 붓으로, 종이 맨 아래 여백에 겨우 두 글자가 적혔다.
미정(未定).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은포의 기록에 그 두 글자가 적힌 것은 백사십 년 만이었다.
계 사람들 중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값을 부르는 사람도 없었다. 어깨에 띠를 걸친 사람들이 서로 눈짓만 하다가 하나씩 그늘에서 빠져나갔다. 나가면서 소하를 보는 사람이 둘 있었고, 안 보는 사람이 더 많았다.
소하는 단에서 내려왔다. 신이 벗겨졌다. 주워서 다시 신는 동안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갔다. 어머니가 아이 손을 잡았다. 잡고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록관만 남아 아이가 서 있던 자리를 오래 봤다. 그리고 소하를 불렀다.
"아이야."
소하가 돌아봤다.
"방금 무엇을 만졌느냐."
소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무엇을 만진 줄도 몰랐다.
기록관은 더 묻지 않았다. 다만 그 장을 다른 종이들과 같이 묶지 않고, 따로 한 번 접어 품에 넣었다.
마당을 나가려는데 사람 하나가 어머니 앞으로 왔다. 관 옷이었다. 어깨에 띠가 없었다.
"어머님." 그 사람이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예?"
"드물기는 하지만 있습니다. 아무 일도 아니니 그냥 데리고 가시면 됩니다."
어머니는 그 말을 두 번 되물었다. 두 번 다 같은 대답을 들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어머니는 소하 손을 잡고 있었다.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은 그 말을 들은 뒤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