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닿는 셈
열이틀째 아침, 마당에는 밤새 누군가 움직인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머니의 발자국이 우물 턱을 몇 번이고 돌아나간 자리였다.
헐린 담 틈으로 들어온 새벽 공기에서 낯선 냄새가 났다. 이웃집 아궁이에서 넘어온 재 냄새였다. 관 담이 서 있을 때는 한 번도 마당까지 온 적 없는 냄새였다.
짐꾼이 지팡이로 마당을 짚어가며 걸음을 셌다. "스물이오." 어제는 열일곱이었다.
이름꾼이 밧줄을 걷어 올려 매듭을 짚었다. 열여섯 번째까지 물이 올라와 있었다. 어제보다 두 매듭이 늘어 있었다.
기록관이 못을 들고 우물 턱 돌 앞에 쭈그려 앉았다. 오늘의 두 숫자를 새기는 동안 손이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소하는 왼손 새끼손가락 끝을 오래 들여다봤다. 마디는 조용했다. 헝겊과 돌과 실, 세 가지 표가 여전히 몸 밖에 놓여 있었다.
흐려짐을 손끝으로 짚어봤다. 셋에서 멎었다. 어제와 같은 자리였다.
어머니는 밤새 마당을 뜨지 않은 것 같았다. 손끝에 실 자국이 붉게 배어 있었고, 품에서 꺼낸 실타래는 어제보다 눈에 띄게 짧아져 있었다.
소하는 그 실타래를 받아 손에 쥐어봤다. 매듭이 다섯 개로 늘어 있었다. 어제는 세 개였다.
"밤새 쟀다." 어머니가 실 끝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짧아지지도 늘지도 않았다."
소하는 그 말을 듣고 손끝으로 자기 이마를 훑었다. 어제와 같은 자리에서 감각이 돌아왔다. 어머니의 매듭과 소하의 몸, 둘 다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소하는 우물 턱에 엎드려 없는 마디를 벽에 댔다. 저쪽에서 저절로 좁아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손끝이 사이를 물었다. 흐려짐이 셋을 셀 동안 갔다.
그 셋 안에 여울의 셈이 왔다. 짧았다. "어제와 같습니다."
소하는 손끝에 힘을 주어 다시 물었다. 밤새 위에서 잰 것이 있었는지, 손이 조여졌는지, 무엇이든 달라진 것이 있었는지를 셈으로 바꿔 보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여울의 셈은 어제보다 느렸다. "밤새 아무도 안 셌습니다."
소하는 손을 떼고 마당 젖은 자리 끝에 놓인 돌을 봤다. 어제 놓은 자리 그대로였다. 밤새 늘어난 것은 매듭과 걸음뿐, 우물 밑은 그대로였다.
소하는 어머니의 실타래를 다시 눈으로 좇았다. 매듭 다섯 개가 밤새 이마 자리를 재고 또 잰 흔적이었다. 저 밑에서는 그 다섯 번이 단 한 번도 안 만져진 셈이었다.
소하는 손끝을 접었다 폈다. 이쪽이 소하에게 아무것도 못 얹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저쪽도 마찬가지라는 것은, 오늘 처음으로 몸으로 확인됐다.
저쪽은 소하가 아닌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못 얹는다. 어머니의 매듭 다섯 개는 실에만 남았고, 우물 밑은 그 다섯 번을 하나도 못 느꼈다.
소하는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해야 했다. 실타래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어머니 앞에 섰다.
"이 매듭이 저 밑에는 안 갔습니다." 소하가 실 끝을 어머니 손에 도로 쥐여줬다. "밤새 재신 건 여기 남았습니다. 밑은 안 움직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도 실을 놓지 않았다. 매듭 다섯 개를 손끝으로 하나씩 짚어봤다. 소하가 잰 이마 자리와 실이 잰 이마 자리, 둘이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 이건 뭘 한 거냐." 어머니가 실을 접어 손바닥에 올렸다. 소하는 그 말에 바로 대꾸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손을 내려다봤다.
어머니 손등에는 밤새 실을 감았다 푼 자국이 하얗게 배어 있었다. 소하는 그 손을 잡아 자기 이마에 가만히 대봤다.
"밤새 재신 게 헛일은 아닙니다." 소하가 어머니 손을 이마에서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오늘 하루, 제가 안 늘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손을 마주 잡은 채 가만있었다. 실타래를 다른 손으로 품에 넣고, 소하의 손목에 감긴 실만 남겨뒀다.
소하는 손목의 실매듭을 손끝으로 훑었다. 어제 지은 매듭 셋에 오늘 다섯이 더해 있었다. 숫자를 세지 않아도 늘어난 건 만져서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물 턱 쪽으로 걸어갔다. 실은 이제 품에 있었지만, 손은 여전히 무언가를 쥐려는 모양으로 반쯤 오므려져 있었다.
헐린 담 밖에서 짧고 고른 발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제와 같은 보폭, 같은 속도였다.
남색 띠의 사내가 우물 턱 앞에 섰다. "값을 부르러 왔습니다." 그가 소매에서 마른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물입니다." 길꾼이 종이를 우물 턱에 펼쳤다. "이 우물이 저쪽과 통한다는 걸 저희가 잡으면, 은포 우물 쉰넷 전부가 저희 값이 됩니다."
"관이 재는 것과 저희가 가져가는 것은 다릅니다." 길꾼이 종이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관은 이 우물 하나를 이백 년 쟀습니다. 저희는 쉰넷을 다 가져갑니다."
소하는 그 종이를 내려다봤다. 우물 이름이 줄지어 적혀 있고 그 옆에 값이 붙어 있었다. 은포의 우물 쉰넷이 한 장에 다 들어가 있었고, 이 우물은 맨 아래에 혼자 떨어져 적혀 있었다.
"값을 부르러 온 사람은 이름을 대야 합니다." 기록관이 못을 든 채로 다가왔다. 길꾼이 이름을 댔고, 기록관은 그것을 우물 턱 돌에 못으로 새겼다.
"관에 맡길지 계에 맡길지, 지금까지는 고를 자리가 없었습니다." 기록관이 새긴 자리에서 손을 뗐다. "이제는 고를 자리가 생겼습니다."
소하는 그 말을 손끝으로 짚듯 되짚었다. 관은 재기만 하고 못 메웠다. 계는 값을 부르고 물을 가져간다. 둘 중 어느 쪽도 여울을 꺼내주겠다는 말은 안 했다.
이름꾼이 밧줄을 쥔 채로 그 자리에 섰다. 길꾼은 이름꾼 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종이만 접어 도로 소매에 넣었다.
"당신 상대는 안 합니다." 길꾼이 소하 쪽으로 몸을 돌렸다. "표 없는 사람하고는 값을 안 다룹니다."
이름꾼은 그 말에 손끝 하나 움찔하지 않았다. 밧줄을 쥔 손에 힘만 조금 더 들어갔다.
길꾼은 값을 부른 자리를 확인하려는 듯 우물 안으로 몸을 기울였다. "직접 재보겠습니다." 그가 우물 턱을 짚고 발을 걸쳤다.
길꾼이 딛는 자리마다 없던 발판이 새로 생겼다. 우물 안쪽 돌벽을 타고 좁은 길이 아래로 이어졌다.
소하는 그 길을 눈으로 좇았다. 길꾼의 몸이 절반쯤 우물 안으로 들어간 순간, 발판이 더 이상 안 생겼다.
길꾼의 발끝이 허공을 짚었다. 디딜 자리가 없는 곳에서 발이 자꾸 미끄러졌다.
"돌아가겠습니다." 길꾼이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짚으려 했다. 발을 딛자 그 자리에 아무 길도 없었다.
길꾼의 몸이 우물 벽에 부딪히며 허공에서 크게 휘청였다. 손끝이 돌벽을 긁었지만 잡히는 것이 없었다.
이름꾼이 밧줄을 놓고 우물 턱 돌 앞으로 갔다. 방금 새겨진 자국에 손끝을 대고 획을 하나씩 따라갔다. 표 없는 사람이 관 기록에 손을 대고 있었고 아무도 그 손을 못 막았다.
이름꾼이 그 이름을 불렀다. 발소리가 나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가 마당 끝까지 갔다.
허공에 뜬 길꾼의 몸이 벽 쪽으로 붙들렸다. 손가락까지는 못 잡았지만 더는 아래로 미끄러지지 않았다.
관 사람 둘과 짐꾼이 그 틈에 팔을 뻗어 길꾼을 끌어올렸다. 몸이 마당 흙 위로 완전히 넘어온 뒤에야 이름꾼은 붙잡은 손을 놓듯 숨을 내쉬었다.
기록관이 그 옆에 서서 방금 있었던 일을 새겼다. 관 표 없는 사람이 관이 새긴 이름을 썼다는 것까지 그대로 새겼다. 이름꾼은 그것을 막지 않았고, 그 뒤로 한동안 자기 손끝만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길꾼은 마당에 주저앉아 다리를 만져봤다. 짧고 고른 보폭으로 걷던 발이 이제 폭을 못 맞추고 있었다. "몇 걸음 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지팡이도 없이 중얼거렸다.
소하는 그 다리를 내려다봤다. 계 일이라던 사람이, 계의 길로도 못 들어가는 자리를 오늘 몸으로 확인했다.
관 마당 안쪽에서 은실 두 줄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담이 없어 마당과 바깥의 경계가 안 보이는 자리였다.
그는 다가와 우물 턱에 손을 얹지 않고 한 걸음 떨어져 섰다. "제가 담을 헐었을 때는 이걸 계산에 안 넣었습니다." 그가 소매의 은실을 쓸어내렸다.
"되사올 수 있습니까." 소하가 물었다.
"없습니다." 은실 두 줄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관 밖이라고 제 입으로 마당 전체에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 소매 안쪽을 잠깐 들여다봤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무언가를 확인하는 손짓이었다.
"될 만한 것을 하나씩 지워왔습니다." 그가 우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번에는 지워지는 쪽이 접니다."
기록관이 못을 든 채 다가와 그 말을 들었다. 돌 위에 새 줄을 하나 더 그었다. 은실 두 줄이 방금 한 말이 그대로 새겨졌다.
은실 두 줄은 그 못 소리를 들으며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넷의 냄새를 몸에서 못 뺀 사람이 다섯 번째 셈을 그 자리에서 받아 적히고 있었다.
그는 몸을 돌려 관 마당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당과 바깥의 경계는 여전히 안 보였지만, 그가 걷는 방향만은 분명히 안쪽이었다.
해가 기울 무렵, 소하는 우물 턱에 다시 섰다. 길꾼도 이름꾼도 여울을 못 꺼냈다.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소하는 손목의 실매듭을 풀어 어머니 품 쪽에 놓아뒀다. 헝겊도 돌도 그 자리에 남겨뒀다. 몸 밖에 둔 표들이 오늘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소하는 왼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 올렸다. 눈을 감고, 숫자를 하나 머릿속에 올렸다. "하나." 소리 내어 세자 없는 마디 끝이 조여드는 감각이 곧바로 따라왔다.
소하는 그 감각을 밀어내지 않고 다음 숫자로 넘어갔다. "둘." 마디가 다시 조여들었다.
흐려짐이 밀려왔다. 셋에서 멎어 있던 그것이 이번에는 안 멎었다. 넷, 다섯, 몸이 어느 쪽에 서 있는지가 점점 흐려졌다.
소하는 셈을 멈추지 않았다. 열둘에 이르러서야 흐려짐이 겨우 가라앉았다. 어제의 넉 배였다.
눈썹 아래에서 오래 멈춰 있던 감각이 그 순간 위로 옮겨갔다. 관자놀이를 지나 눈썹 위, 이마 한가운데로.
소하는 손끝으로 이마를 짚어봤다. 손이 닿는 감각이 이마 꼭대기까지 사라져 있었다. 남은 자리가 없었다.
우물 밑에서 밧줄이 팽팽히 당겨졌다가, 처음으로 그 당김이 반 박자 먼저 풀렸다. 안 뗀 손이 무언가에 응했다는 뜻이었다.
어머니가 마당 저편에서 소하 쪽으로 뛰어왔다. 입이 크게 벌어져 무언가를 부르고 있었다.
소하는 그 입 모양을 봤다. 분명히 자기 이름이었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안 왔다.
이름꾼도 달려와 뭔가 외쳤다. 기록관의 못이 돌을 두드리는 손짓도 보였다. 셋 다 입과 손은 움직이는데 소리만 통째로 비어 있었다.
소하는 귀를 손으로 덮었다가 떼봤다.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이쪽에서 오는 소리는 이제 하나도 안 걸렸다.
그때 우물 밑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물소리도 아니고 사람 소리도 아닌, 낮고 긴 울림 하나가 귓속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왔다. 소하는 그것이 여울의 셈인지, 안 뗀 손이 처음으로 내는 소리인지, 아니면 저쪽 전체가 이쪽을 향해 내는 소리인지 가늠하지 못한 채로, 어머니의 벌어진 입과 이름꾼의 뻗은 손과 기록관의 멈춘 못을 마당 저편에 세워둔 채 우물 턱에 이마를 대고 그 울림 하나에만 온몸을 기울였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마지막 회차입니다.
다음 회차는 월·금에 올라옵니다.
댓글 0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구글로 로그인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줄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