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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자의 신화
    6화 · 2026년 9월 17일

    판도라는 상자를 연 적이 없다 — 재앙의 이름이 붙기까지

    원전에 적힌 것은 항아리다

    헤시오도스의 『일과 나날』 94행에서 판도라가 여는 것은 피토스(pithos)다. 피토스는 사람 키만 한 저장용 독으로, 땅에 반쯤 묻어 두고 곡식과 기름과 포도주를 재던 살림 그릇이다. 크노소스 궁전 창고에 줄지어 선 그 항아리가 바로 피토스다. 무릎에 올려놓고 여닫는 작은 함이 아니라, 한 집의 일 년치 양식이 들어가는 물건이다.

    이름도 항아리도 나중에 붙었다

    같은 저자의 두 책을 나란히 놓으면 순서가 드러난다. 『신들의 계보』 570~590행에도 첫 여자를 빚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그 여자는 이름이 없고 항아리도 나오지 않는다. 판도라라는 이름과 재앙의 항아리는 『일과 나날』에 와서야 함께 붙는다. 우리가 판도라 신화라고 부르는 장면은 한 번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두 편의 시 사이에서 조립된 것이다.

    상자는 천오백팔 년에 생겼다

    상자는 그리스어에 아예 없다. 1508년 에라스무스가 『아다기아』에서 이 이야기를 라틴어로 옮기며 피토스를 픽시스(pyxis), 곧 작은 함으로 적었다. 이 번역이 르네상스 화가들에게 넘어갔고, 그때부터 판도라는 무릎 위의 상자를 여는 여자로 그려진다. 항아리가 상자가 되는 데 이천 년 남짓이 걸린 셈이다.

    도기에 새겨진 다른 이름

    그런데 상자보다 훨씬 앞선 자료에는 다른 이름이 남아 있다. 기원전 460년경 아티카 백색 킬릭스(대영박물관)에는 헤파이스토스와 아테나 사이에 선 여자 곁에 아네시도라(ANESIDORA)라고 새겨져 있다. 땅에서 소출을 밀어 올리는 자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새』 971행에도 판도라에게 제물을 바치라는 지시가 나오는데, 제물을 받는 쪽은 재앙의 원인이 아니라 대지다.

    어디까지가 기록이고 어디부터가 해석인가

    문헌과 유물로 확인되는 것은 여기까지다. 『일과 나날』의 피토스, 『신들의 계보』에 이름도 항아리도 없다는 사실, 1508년 판본에 남은 에라스무스의 픽시스, 도기에 새겨진 아네시도라 명문.

    해석은 그다음이다. 판도라가 본래 대지의 여신이었고 헤시오도스가 그를 재앙의 기원으로 끌어내렸다는 설명은 19세기 이후 학계의 가설이며, 아네시도라가 별칭인지 별개의 이름인지도 논쟁이 남아 있다. 다만 한 가지는 논쟁거리가 아니다.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는 그 장면은 원전의 장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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