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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정 — 열일곱 번째 속성
    10 · 2026년 8월 18일

    먼저 온 사람

    밤의 조선시대 시골 마당, 우물 아가리에서 뿌연 김이 피어오른다. 한 여자가 우물 턱에 서서 두 손으로 밧줄을 세게 붙들고 있고, 입에서는 차가운 밤공기 속에 하얀 입김이 처음으로 새어나온다. 등잔 여러 개가 따뜻한 빛을 드리우고 담 그늘에 다른 사람들의 형체가 흐릿하게 보인다.
    발소리 한 번 안 내던 사람이 그 순간 숨을 짧게 뱉었다.

    문이 열렸다. 이름꾼이 들어섰다. 사십쯤 되는 여자, 어깨에 띠가 없고 마당을 디디는 발소리가 나지 않는 걸음이었다. 옷자락에 성 밖 먼지가 아직 앉아 있었고 소매 끝동이 낡아 있었다. 하루를 꼬박 걸어온 걸음인데도 숨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눈 밑에 그늘이 있었다. 소하는 그 얼굴을 알아보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신을 벗어 우물 턱에 놓고 밧줄을 두 번 감아 쥐었다.

    마당에는 등잔이 여럿 걸려 있었다. 관 사람들이 평소보다 많이 나와 서 있었다. 다들 말이 없었고 발소리도 낮춰 걸었다.

    이름꾼은 곧장 우물로 왔다. 관 사람들 사이를 지나면서 아무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소하는 반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름꾼과 우물 사이에 몸을 두고서야 걸음을 멈췄다. 이름꾼이 우물 안을 한 번 내려다보고 다시 소하를 봤다. 눈이 마주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부르러 왔습니다."

    "제가 먼저입니다." 소하는 밧줄을 놓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도 불렀고 지금도 걸고 있습니다."

    이름꾼은 대꾸하지 않고 소하의 오른손을 봤다. 손끝이 아직 조금 붉었다. 그는 반 걸음 물러섰다. 밀어붙이지 않았다.

    기록관이 붓과 자를 들고 다가왔다. "규정에 순서는 없다. 먼저 온 사람이 부른다고만 돼 있다." 그가 소하의 밧줄과 이름꾼의 빈손을 번갈아 봤다. "오늘 먼저 온 것은 저 아이고, 아직 안 끝났다."

    "언제 끝납니까." 은실 두 줄이 담 그늘에서 나왔다. 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저 팔은 흔적으로도 안 읽히고 향으로도 안 맡아진다. 관이 잴 수 없는 것을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다."

    "내일 아침입니다." 기록관이 말했다. "규정은 아침에 한 번입니다."

    "그 규정을 오늘 밤으로 바꾼다." 은실 두 줄이 소하 쪽으로 손을 폈다. "지금 내려가라. 못 하면 저쪽이 부른다."

    이름꾼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부르면 더 빠릅니다."

    "빠른 것과 먼저 온 것은 다릅니다." 기록관이 붓끝으로 소하를 가리켰다. "규정은 먼저 온 사람입니다. 오늘은 저 아이입니다."

    "먼저 온 사람이 부르라고 정한 건 누굽니까." 은실 두 줄이 물었다.

    "제 앞사람입니다." 기록관이 답했다. "그 앞사람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원래부터 그렇게 돼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릅니다."

    은실 두 줄은 그 대답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래됐다고 계속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가 몸을 반쯤 돌렸다. "낡은 규정은 관이 바꾼다. 오늘 밤이 그때다."

    기록관은 붓을 놓지 않았고 더 말하지도 않았다. 소하는 그 붓이 종이 위에서 멈춰 있는 것을 봤다. 규정은 이미 한 번 읽혔고 두 번 읽어도 같은 말이었다.

    이름꾼은 대답 없이 우물 아가리를 봤다. 밤공기는 찬데 그 안에서 뿌연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등잔 불빛에 그것이 얇게 비쳤다. 어제까지 벽에서 올라온 것은 마른 바람이었는데 오늘은 그 바람이 눈에 보이는 김이 되어 있었다. 우물이 식어가는 표가 아니라 데워지고 있다는 표였다.

    소하는 손등을 우물 턱에 대봤다. 어제는 손등에 닿는 것이 없었는데 오늘은 그 김의 온기가 잡혔다. 손을 떼도 온기는 잠깐 남아 있었다.

    소하는 그 김을 보다가 이름꾼에게 물었다. "여섯 해 동안 왜 한 번도 안 불렀습니까."

    이름꾼의 문장이 그때 길어졌다. "내 이름을 말하면 남이 나를 앉힐 수 있다고 했었지. 부르는 것도 같다. 내가 부르면 내가 잡는다. 나는 관 사람이고, 내가 잡은 것은 관이 쥔 것과 같다. 육 년 동안 그 애를 안 부른 건 못 해서가 아니었다. 부르는 순간 내 손에 잡히고, 내 손은 관의 손이니까. 우물 밑에 두는 것과 관에 넘기는 것 중에 나는 우물을 골랐다. 그 애가 젖은 채로 사는 것이 마른 채로 관에 잡히는 것보다 나았다."

    은실 두 줄은 그 말에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이유는 관에 필요 없다. 부르든 안 부르든 오늘 안에 끝나야 한다."

    소하는 그 말을 셈으로 받았다. 이름꾼이 부르면 여울은 이름꾼의 손에 잡히고 그 손은 관의 손이다. 소하가 부르면 잡히는 것은 소하의 손이고, 그 손은 흔적으로도 향으로도 안 잡힌다. 오늘 처음으로 그것이 쓸 데가 있었다.

    "그러니 네가 불러라." 이름꾼이 밧줄에서 손을 뗐다. 명령이 아닌 말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나는 줄 옆에 있겠다."

    기록관이 자를 소하의 저고리 깃 안으로 넣었다. "목 언저리다." 목소리는 변하지 않았다. "빗장뼈 아래 두 치였던 것이 저녁 사이에 여기까지 왔다."

    "한나절도 안 됐습니다." 소하가 저고리를 도로 여몄다.

    "안다." 기록관이 붓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어제보다 빠르다는 것도 적어놨다."

    "그래서 오늘 밤으로 바꾸는 거다." 은실 두 줄이 짧게 말했다.

    소하는 대답 대신 매듭을 한 번 더 죄었다.

    소하는 눈을 감고 내려갔다. 오른손 손끝에 아침의 저림이 아직 조금 남아 있어서 밧줄을 더 세게 감아 쥐었다.

    발가락으로 벽을 훑었다. 위쪽은 마르고 거칠었다. 오른쪽 귀로 숨소리가 돌아오는 것을 셌는데 어제보다 낮은 자리에서 벌써 흐려졌다. 어제는 열두 자에서 미끄러운 온기가 잡혔는데 오늘은 아홉 자에서 벌써 벽이 젖어 있었다. 하루가 다 가지도 않았는데 석 자가 또 와 있었다.

    안에서도 김이 느껴졌다. 얼굴에 닿는 공기가 위보다 눅눅했다.

    "밖에 사람 있습니까."

    "있습니다." 여울의 목소리가 왔다. "오늘은 다른 사람이 왔습니까."

    "왔습니다. 줄 옆에 있겠답니다." 소하는 발바닥을 벽에 붙였다. "아홉 자에서 벽이 젖어 있습니다. 어제보다 미끄럽습니다."

    "여기는 낮부터 젖었습니다." 여울이 답했다. "낮과 밤이 다르게 옵니다."

    "밖에 온 사람이 누굽니까."

    "당신 언니입니다."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벽에서 배어 나온 물소리만 아래로 흘렀다.

    소하는 매듭을 손끝으로 세었다. "부르겠습니다. 여울."

    밤 관 마당에 등잔이 한꺼번에 들어온다. 소매에 은실 두 줄을 두른 윗사람이 가운데서 우물을 가리키며 지시하고, 관 사람들이 등잔과 줄을 들고 바삐 오간다. 늙은 기록관은 붓과 펼친 장부를 들고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규정을 오늘 밤으로 바꾼다고 그가 말했다.

    오른손 저림이 이번엔 손끝에서 멈추지 않았다. 손바닥을 지나 손목까지 올라갔고 잠깐 손가락이 접히지 않았다. 몸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어제는 두 자에서 멈췄는데 이번엔 매듭이 넉 자를 지나서야 손에 다시 잡혔다.

    "가까워졌습니다." 여울이 말했다. "이번엔 저도 놀랐습니다."

    손끝에서 시작된 저림이 팔꿈치까지 올라왔다. 어제는 손목에서 멈췄었다.

    소하는 줄을 감으려 했다. 감기지 않았다. 몸이 계속 아래로 갔다.

    위에서 밧줄이 팽팽해졌다. 이름꾼의 손이 소하 대신 그것을 붙들고 있었다. 발소리 한 번 안 내던 사람이 그 순간 숨을 짧게 뱉었다.

    "됐다." 이름꾼의 목소리가 낮게 왔다.

    몸이 멈췄다. 소하는 오른손을 펴봤다. 손가락이 다시 접혔다.

    "손이 있습니까." 소하가 물었다. "제 팔에 아직 안 뗀 손 말입니다."

    "있습니다." 여울이 답했다. "오늘은 더 세게 잡습니다."

    "왜 세집니까."

    "모릅니다." 여울의 대답이 늦게 왔다. "저도 셀 새가 없었습니다."

    소하는 그 대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 캐묻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소하가 줄을 감기 시작했다. 손끝은 여전히 저릿했다.

    우물 턱을 넘어오자 흔적꾼이 소하의 왼팔을 두 손가락으로 짚었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

    "먼저 닿은 쪽을 알겠습니다." 그가 손끝에 힘을 주지 않고 말했다. "이 손은 저쪽 아이를 먼저 잡았습니다. 당신은 나중입니다. 처음 이 우물에 내려온 날부텁니다."

    이름꾼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소매 자락을 한 번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소하는 그 말을 셈에 넣었다. 그 손은 육 년째 여울을 잡고 있었고 닷새 전부터 소하도 같이 잡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손이 셋째를 잡을 수도 있습니까." 은실 두 줄이 물었다.

    "모릅니다." 흔적꾼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지는 안 잡힙니다."

    "손입니까, 사람입니까." 소하가 물었다.

    "모릅니다." 흔적꾼이 손을 뗐다. "닿은 순서만 압니다. 무엇인지는 안 잡힙니다."

    기록관이 붓을 종이에 대고 오늘 것을 적었다. 목 언저리, 벽 아홉 자, 매듭 넉 자, 오른손 저림이 팔꿈치까지. 그 옆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안 뗀 손, 여울이 먼저. 이름꾼은 그 옆에 서서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밧줄을 잡았던 자리가 아직 빨갛게 남아 있었다.

    "저도 재겠습니까." 이름꾼이 물었다.

    기록관이 붓을 멈췄다. "규정에 없다."

    "그럼 안 적으셔도 됩니다." 이름꾼이 손을 소매 속으로 넣었다. "저는 압니다."

    이름꾼은 손을 펴 보이지 않았다. 소매 안에서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는 것이 옷 위로 비쳤다. 붉어진 자리가 아직 식지 않은 모양이었다.

    은실 두 줄은 담 그늘에서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는 우물 쪽을 한 번 보고 돌아섰다. 걸음은 올 때보다 느렸다.

    소하는 방으로 돌아와 종이를 폈다. 오른손으로 오늘 것을 적었다. 목 언저리. 벽 아홉 자, 낮부터 젖음. 매듭 넉 자, 혼자서는 안 멈췄음. 그 밑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손은 여울을 먼저 잡았고 나는 나중이다.

    왼손은 무릎 위에 뒤집어 놓은 채였다. 오른손은 아직 저릿했고 종이를 접는 데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 손가락을 세 번 접었다 펴야 다 접혔다.

    성 밖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짐꾼도 있었다. 오늘은 둘 다 소하를 찾아오지 않았고 소하도 그 둘을 부르지 않았다.

    문밖에서 이름꾼이 밧줄 걸린 우물 턱 쪽을 보고 서 있는 것이 창호지 너머로 비쳤다. 그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관 사람이 두어 번 다가가 말을 붙였지만 대답하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소하는 등잔을 끄기 전에 셈을 한 번 더 했다. 벽은 이제 반나절에 석 자씩 올라온다. 어제까지의 두 배다. 오늘 밤이 아홉 자였으니 내일 이맘때는 여섯 자쯤에서 물이 배어 나올 것이다. 목 언저리를 넘으면 무엇이 되는지는 아직 아무도 안 적어놨다. 그리고 그 손은 여울을 소하보다 여섯 해 먼저 잡았으면서 오늘은 소하 쪽을 더 세게 당겼다. 소하는 어두운 방에서 오른손을 폈다 쥐어 손가락이 전부 접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눈을 감았다. 창호지 밖에서는 이름꾼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고, 우물 턱 위로 김이 가늘게 오르는 것이 등잔 빛에 비쳤다. 내일 아침에도 먼저 온 사람이 부른다. 그 사람은 우물 앞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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