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는 손
열사흘째 아침, 소하는 눈을 뜨자마자 두 손을 마당 흙에 짚었다. 짐꾼의 지팡이 끝이 어디쯤 와 있는지 손바닥으로 먼저 알고 싶어서였다.
흙은 밤새 내린 이슬로 젖어 있었다. 지팡이가 한 번 찍힐 때마다 손바닥 밑으로 짧은 울림이 지나갔다. 하나, 둘, 셋. 소하는 눈을 감고 그 울림을 따라 셈을 이었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서 보니 같은 울림이 발바닥으로도 올라왔다. 손보다 늦게 왔지만 더 오래 남았다.
짐꾼이 마당 저쪽 끝에서 몸을 돌렸다. 지팡이 끝으로 흙을 두 번 더 찍고는 소하 쪽으로 입을 크게 벌려 한 마디씩 끊었다. 스, 물, 셋. 소하는 그 입술의 모양을 하나씩 따라 읽었다. 어제보다 세 걸음이 늘어 있었다.
소하는 입 모양을 그대로 따라 하며 소리 내어 말했다. "스물셋입니다." 제 목소리도 스스로에게는 닿지 않았지만, 입술이 움직이는 감촉만은 남았다.
입술을 읽는 것은 아침 내내 배운 것이었다. 짐꾼처럼 천천히 벌리는 입은 읽혔고, 어머니처럼 짧게 끊는 입은 절반쯤 읽혔다. 기록관은 입술을 거의 안 움직이는 사람이라 세 마디에 한 마디밖에 안 잡혔다.
소하는 마당 돌 두 개를 나란히 놓고 기록관에게 짚어 보였다. 돌이 앞으로 나와 있으면 지금 우물에 가도 된다는 뜻으로 정한 것이었다. 기록관이 돌 하나를 뒤로 밀었다. 아직은 아니라는 답이었다. 소하는 다시 앉아 해가 더 오르기를 기다렸다.
기록관이 우물 턱에 앉아 못을 대고 있었다. 못 끝이 돌을 두드릴 때마다 우물 턱을 짚은 소하의 손바닥으로 짧고 단단한 진동이 올라왔다. 소하는 그 진동의 간격을 세어 못이 몇 번 돌을 쳤는지 헤아렸다.
열여덟 번, 그렇게 헤아려졌다. 소하는 마당 빨랫줄로 달려가 밧줄을 손으로 훑었다. 밤새 마르지 않은 삼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코 안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코 안쪽이 서늘해지는 냄새였다. 마당의 어느 것과도 안 닮아서 소하는 손등을 대고 두 번 더 맡았다. 매듭을 하나씩 짚어 세니 열여덟에서 멈췄다. 어젯밤보다 둘이 늘어 있었다.
어머니가 다가와 소하의 손을 잡아 매듭 하나를 더 짚게 했다. 숫자는 한마디도 입에 안 담았다. 손 시리다, 들어와라. 소하는 그 짧은 입술을 반쯤 읽고 나머지는 잡아끄는 손에서 받았다.
소하는 고개를 젓고 빨랫줄에서 짧은 삼줄 한 가닥을 끊어와 매듭 셋을 지었다. 어머니 앞에 내밀며 손으로 가리켰다. 아침과 점심과 저녁 중 언제 우물에 가도 되는지 묻는 셈이었다. 어머니가 매듭 하나를 풀어 둘만 남기고 도로 건넸다. 점심엔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소하는 매듭이 이번엔 헤아리는 일 대신 말을 나르는 일로 쓰였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소하는 기록관 옆에 놓인 관 종이 한 장을 끌어왔다. 오른손으로 붓을 쥐고 여울에게 전할 말을 옮겨 적었다. 종이가 자꾸 말려 오르자 무심코 왼손으로 귀퉁이를 눌렀다. 손가락이 닿은 자리부터 글자가 있던 데가 그냥 종이가 됐다. 번지지도 않았고 얼룩도 남지 않았다. 방금 적은 것이 순식간에 없어졌다.
기록관은 얼룩진 종이를 거두고 우물 턱 돌로 가서 못을 댔다. 소하가 읽을 수 있는 쪽으로 답하는 것이었다. 돌에 새긴 것만 관의 기록입니다. 소하는 젖은 흙으로 눈을 돌려 나뭇가지를 오른손에 쥐고 같은 것을 다시 새겼다. 이번에는 지워지지 않았다.
소하는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우물 턱에 두 손을 짚었다. 왼손 새끼손가락 마지막 마디는 며칠째 거기 없었지만, 없는 자리로 저쪽의 사이 하나가 걸렸다. 좁아지는 쪽을 따라 마디를 밀어 넣었다.
여울의 셈이 먼저 왔다. 소하는 그 안에 물음 하나를 얹었다. 어젯밤 우물 밑에서 올라온 긴 울림이 여울의 것인지 물었다. "저는 아무 소리도 안 냈습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소하는 다시 짚어 넣었다. 그럼 그 울림은 안 뗀 손에서 온 것인지 물으며 손끝에 힘을 더 실었다. 마디가 있던 자리가 뻐근하게 당겨왔다.
이번엔 대답 대신 울림이 그대로 올라왔다. 길게 하나, 짧게 둘, 길게 하나. 우물 턱을 짚은 손바닥이 그 간격을 그대로 받았다. 소하는 셈을 헝겊과 실로 옮겼다. 매듭 대신 울림의 길이를 그대로 옮겨야 했다. 길게, 짧게, 짧게, 길게. 손끝으로 그 순서를 실에 매어 가며 뜻을 읽어냈다.
여섯 해 동안 한 번도 안 낸 소리였다. 저쪽은 여기가 어디까지인지 몰랐다. 알려면 이쪽 것 하나를 붙잡고 있어야 했고, 그 하나가 여섯 해째 여울이었다. 놓으면 잰 것이 도로 흩어진다고 했다.
이름꾼이 곁에서 입 모양으로 물었다. 왜 하필 지금인지. 소하는 입을 열어 먼저 답했다. "모릅니다." 그리고 손끝으로 매듭을 다시 짚으며 셈을 되짚기 시작했다.
이름꾼이 소하 앞으로 돌아앉아 입을 천천히 벌렸다. 손끝은 자기 이름 자국을 짚은 채였다. 저도 표를 잃던 날에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한참 뒤에야 알았으니 이번에도 서두르지 마십시오. 소하는 그 입술을 끝까지 읽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마를 넘은 것이 어제였고 울림이 처음 올라온 것도 어제 밤이었다. 두 날이 같았다. 이쪽 소리가 하나도 안 걸리게 된 그날, 저쪽은 처음으로 소하 전부를 자기 셈에 넣은 것 같았다. 소하는 손바닥으로 돌을 다시 짚으며 그럼 왜 하필 그날인지 물었지만 대답은 오지 않았다. 대신 흐려짐이 밀려왔다. 몸이 마당에 서 있는지 우물 밑에 서 있는지 갈피를 잃었고, 짚은 손의 좌우가 뒤바뀌었다. 무릎이 꺾이려는 순간 손바닥에 닿은 돌의 감촉을 붙잡고 겨우 버텼다.
소하는 나무판에 안 뗀 손, 자리, 바뀜을 새겨 들고 마당귀 그늘로 갔다. 관 종이에서 한 번 실패한 뒤로는 나갈 때마다 나무판부터 챙기게 되었다. 무명이 왼쪽으로 여민 옷깃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앉아 있었다. 소하는 판을 내밀어 짚었다.
무명이 판을 오래 들여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소하가 자기 귀를 가리키고 손바닥을 천천히 저어 보이자 무명은 알아듣고 입을 크게 벌려 한 마디씩 끊어 말했다. 자기 이야기를 할 때만 문장이 길어지는 사람이었다. "여섯 해 전, 문턱을 밟고 있던 건 소인이 아니었소. 그쪽에서도 사람 하나를 세워 두고 있었는데 그날 자리가 바뀌었소. 밀려 떨어진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대신 선 것이오. 우리 쪽에는 두 손으로 받쳐 물을 옮겨 담는 그릇이 있소. 한쪽이 차는 만큼 다른 쪽이 비오. 문턱이 딱 그 그릇이오."
소하는 판 위에 새로 새겼다. 바뀔 수 있다는 뜻인지. 무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술을 다시 크게 벌렸다. 다만 왜 재는지는 소인도 모르오. 그러고는 옷깃 안쪽을 짚으며 문턱의 숨소리가 요 며칠 유난히 가깝게 잡힌다는 말을 보탰다.
소하는 판 위에 다시 새겼다. 그럼 소하도 자리를 바꿀 수 있는지. 무명은 대답 대신 옷깃만 매만지며 눈을 내리깔았다.
흔적꾼이 그 옆에서 소하의 젖은 왼팔을 걷어 살폈다. 말이 안 닿는 것을 알고는 입 대신 손가락으로 짚었다. 팔꿈치 위쪽을 한 번 누르고 손을 뗐다가, 같은 자리를 아주 약하게 다시 눌렀다. 여섯 해를 거기 얹혀 있던 여울의 손자국이 옅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흔적꾼이 이번엔 팔뚝 중간을 짚고 손을 오래 뒀다. 그 자리부터는 안 뗀 손이 새로 옮겨 잡은 자국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러고는 손바닥을 펴 보이고 고개를 저었다. 안 뗀 손이 사람인지 손인지는 여전히 못 읽는다는 것을, 묻기 전에 먼저 밝히는 사람이었다.

해가 마당 담장 너머로 기울 때, 소하는 다시 우물 턱에 두 손을 짚었다. 낮 동안 짚어낸 것들을 하나씩 되짚었다. 저쪽이 이쪽을 재려면 붙잡을 것이 필요하다면, 소하 자신을 그 셈 안으로 밀어 넣으면 손이 여울 대신 다른 것을 붙잡을 수도 있었다.
소하는 소리 내어 셈을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목소리는 스스로도 듣지 못했지만 입술과 가슴의 울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셈이 이어질수록 없는 마디가 다시 좁아졌다.
기록관이 우물 턱 옆에 붙어 서서 못을 쥐었다. 소하가 셈을 잇는 동안 진동이 잡히는 자리를 표시해 두려는 것이었다.
우물 밑에서 반응이 왔다. 처음엔 늘 물러나기만 하던 여울의 셈이 이번엔 위로 올라왔다. 밧줄이 손바닥 안에서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소하는 그 만큼을 손끝으로 확인했다. 젖은 매듭 하나만큼, 여울이 올라와 있었다.
여울의 셈이 뒤따라왔다. 짧은 숫자 하나, 하나. 오늘 처음으로 여울이 스스로 보낸 셈이었다. 소하는 그것을 밧줄 매듭 옆에 나란히 묶어 두었다.
대가는 곧바로 왔다. 왼손 약지 마디까지 저쪽에 마저 섰다. 흐려짐이 자리를 잃은 순간 몸이 마당과 우물 밑 사이 어디에도 온전히 없는 것처럼 흔들렸다. 하나, 둘… 소하는 흐려짐의 길이를 세어 스물까지 갔다가 겨우 돌아왔다.
흔적꾼이 손끝을 떼지 않은 채 다시 팔을 짚었다. 왼손 약지 마디까지 색이 짙어져 있다고, 그 이상은 아직 못 읽는다고 밝혔다.
손끝으로 매듭을 다시 짚으며 셈을 이었다. 한 번에 매듭 하나, 마디 하나. 이대로 몇 번을 더 하면 자신이 여울이 서 있는 그 자리에 고스란히 서게 된다는 셈이 나왔다.
소하는 우물 턱에서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아침에 같은 걸음을 세어 뒀던 자리였다. 그때는 다섯 걸음째까지 손끝에 잡히고 여섯 걸음째에서 끊겼다. 이번에는 열을 넘고 스물을 넘어도 안 끊겼다. 마당 끝 스물다섯 걸음째, 담이 헐린 자리에 맨발을 딛고 서서도 울림은 발바닥으로 그대로 올라왔다.
기록관이 그 두 숫자를 나란히 못으로 새겼다. 아침 다섯, 저녁 스물다섯. 우물 밑에 있던 것이 하루 만에 마당 전체를 자기 안에 넣은 셈이었다.
마당에 어둠이 내려앉자 짐꾼이 등불을 마당 끝에 걸었다.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그 아래 흙바닥으로 옅은 떨림이 함께 번졌다. 소하는 맨발로 그 떨림을 밟고 서서 우물 쪽을 바라보았다.
관 위쪽 계단에서 누군가 내려왔다. 소매에 은실이 세 줄 감겨 있었다. 마당 사람들이 전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소하는 그 입술을 읽었다. 은실 두 줄, 표를 내놓으십시오. 관 밖으로 나가는 우물을 낸 사람을 관 안에 둘 수 없습니다.
은실 두 줄이 품에서 표를 꺼내 내밀었다. 낯빛은 흔들리지 않았고 입술이 짧게 두 번 움직였다. 제가 정한 규정으로 제가 지워지는 것입니다. 그 뒤에 한 마디가 더 붙었지만 소하는 그것까지는 못 읽었다.
기록관이 못을 들어 그 자리를 그대로 돌에 새겼다. 표를 내놓은 사람의 이름 옆에 표 없는 사람이 된 날짜를 적었다. 이름꾼이 그 옆에 서서 자신의 이름 자국을 손끝으로 짚었다. 같은 자리에 선 사람이 하나 늘었다는 뜻이었다.
은실 두 줄은 관 안쪽 계단 대신 마당을 가로질러 우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표 없는 두 손이 허리춤에서 흔들렸다. 소하는 그 걸음의 진동이 발바닥으로 지나가는 것을 그대로 세어 두었다.
소하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손끝으로 매듭을 다시 짚었다. 젖은 매듭 하나만큼 여울을 올리는 데 손가락 마디 하나만큼의 몸이 저쪽에 섰다면, 여울을 끝까지 끌어 올리는 길은 결국 소하가 가진 것을 전부 저쪽에 내주어야 끝나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끌어 올리는 대신 소하 자신이 먼저 그 자리에 서서 손이 붙잡을 것을 하나 더 만들어 주는 쪽이 오히려 매듭 수를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손끝에서 맴돌았다. 우물 밑에서 다시 낮은 울림이 올라왔고, 소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채로 손바닥에 남은 떨림만으로 그 뜻을 받으며 내일은 매듭을 몇 개 더 엮어 와야 할지, 그리고 그중 몇 개가 저쪽에 서는 소하의 것이 될지를 오늘 하루의 셈에 마저 얹어 여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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