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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성이 없어서 벽을 지납니다
    19화 · 2026년 9월 7일

    대신 선 자리

    새벽빛이 방문 틈을 채 넘기도 전에, 소하는 이불 밑에서 손끝으로 실꾸리를 더듬어 찾았다. 실은 어젯밤 자리끼 옆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손가락으로 매듭을 하나씩 지어 나가는 동안, 방 안의 다른 소리는 하나도 걸리지 않았다.

    매듭을 셋 지어 어머니 손에 쥐여줬다. 오늘 셈이 크다는 것, 어머니가 알아야 할 것은 그것뿐이었다. 어머니는 매듭을 손끝으로 한 번 훑고 소하의 등을 밀어 방문 쪽으로 돌려세웠다. 캐묻는 손짓은 없었다.

    밥그릇은 이미 마루 끝에 놓여 있었다. 소하는 숟가락을 쥐기 전에 손등으로 그릇 가장자리를 한 바퀴 훑어 온기를 쟀다. 온기가 남아 있다는 것은 어머니가 밤새 이 자리를 지켰다는 뜻이었다.

    숟가락을 몇 번 뜨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부엌 문턱에 서서 소하의 등만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건네려다 그만두는 입 모양이 몇 번 스치지만, 소하는 그것을 굳이 읽으려 하지 않았다. 오늘 아침만은 몰라도 되는 말이 있었다.

    마당으로 나선 소하는 오른손 손가락을 젖은 흙에 박아 넣었다. 기록관은 우물 턱 옆에 벌써 서 있었다. 소하가 흙에 적었다 — 오늘, 여울.

    기록관의 손이 못을 쥐고 우물 턱 돌을 두드렸다. 진동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소하는 그 새겨진 모양을 손끝으로 읽었다. 규정 스물두째 조, 우물 재기는 미정 본인의 뜻으로 중단될 수 없음.

    소하는 그 문장 끝에 손가락을 한 번 더 대봤다. 못자국은 젖은 왼손이 스쳐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 사실이 오늘따라 든든하게 느껴졌다. 오른손으로 적은 것들은 이따가 왼손이 닿으면 흩어지겠지만, 이 돌 위의 것만큼은 며칠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었다.

    짐꾼이 지팡이 끝으로 마당 흙을 짚어가며 걸어왔다. 스물여섯 번, 지팡이 끝이 짓이겨 놓은 자국이 소하의 발바닥에 그대로 왔다. 짐꾼이 밧줄을 들어 매듭을 하나씩 짚었다. 스물, 밧줄에 남은 젖은 매듭의 수였다.

    짐꾼은 지팡이를 짚으며 마당을 벗어나 골목 끝까지 걸어갔다가 되돌아왔다. 그동안에도 그 걸음의 울림은 끊이지 않고 소하의 발바닥에 그대로 와 닿았다. 어제까지는 마당 안에서만 오던 것이었다.

    소하가 기록관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기록관의 손이 새 못을 쥐었다. 돌에 새겨지는 것은 마당을 지나 골목 끝까지 이어지는 새 거리였다. 소하는 그 새 자국을 손바닥으로 두 번 눌러 확인했다.

    이름꾼이 우물가에 나타난 것은 짐꾼이 지팡이를 다시 세워 쥔 직후였다. 밧줄을 쥔 손이 먼저 왔고 얼굴은 그다음이었다. 손가락이 밧줄 매듭을 하나하나 짚어 내려가다가, 자기 이름이 새겨진 자국에서 멈췄다.

    그 손가락은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소하는 그것을 눈으로만 봤다. 이름꾼의 입이 짐꾼처럼 천천히 벌어지고, 소하는 그 말을 놓치지 않고 읽었다.

    여섯 해 전에도 이 자리에 이렇게 서 있었습니다. 그때는 매듭이 지금의 갑절이었고, 저는 젖은 흙에 이름 하나 적을 줄도 몰랐습니다. 이름꾼의 입술은 거기서 다물리고, 손가락은 다시 매듭을 짚기 시작했다.

    소하는 이름꾼의 손등을 짧게 두드려 줬다. 위로의 말 대신 그 손에 얹을 수 있는 것은 진동 하나뿐이었다. 이름꾼은 그 두드림을 받고서야 손가락을 마저 매듭 끝까지 짚어 냈다.

    길꾼은 마당 구석 담벼락에 기대어 있었다. 짧고 고른 보폭을 잃은 뒤로 그는 자기 걸음을 세지 못했다. 그런데도 소하가 마당을 가로지를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무언가를 헤아리고 있었다.

    소하가 우물 쪽으로 다가서자 길꾼이 접었던 손가락을 모두 펴 보였다. 자기 것은 못 세면서 남의 것은 정확히 셌다. 소하는 그 손을 한 번 붙잡았다가 놓았다.

    길꾼의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새로 박여 있었다. 담벼락에 기댄 채로 며칠을 손가락만 접었다 폈다는 뜻이었다. 소하는 그 굳은살을 눈으로 훑고 다시 우물 쪽으로 몸을 돌렸다.

    길꾼은 소하가 몸을 돌린 뒤에도 접었던 손가락을 다시 펴지 않았다. 오늘 몫의 걸음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는 듯, 손끝을 그대로 세워 둔 채 담벼락에 기대어 있었다.

    은실 두 줄이 마당에 들어선 것은 해가 담장 위로 올라온 뒤였다. 밧줄 앞에 선 그의 자리는 넷을 내려보낸 그 손이 여섯 해 만에 처음 붙는 자리였다.

    기록관의 못이 다시 돌을 두드렸다. 소하는 손바닥으로 그 울림을 받았다. 은실 두 줄, 표 없음, 밧줄 앞. 기록관은 그것도 다른 것과 다르지 않게 그대로 새겼다.

    은실 두 줄의 입술이 짧게 움직였다. 절반쯤만 소하의 눈에 잡혔다 — 이번엔 올리는. 나머지는 입술이 너무 빨리 다물려 읽히지 않았다. 소하는 그 반쪽 문장을 손바닥에 옮겨 적어 뒀다.

    은실 세 줄이 우물 턱 반대편에 섰다. 지난번처럼 관 위쪽 옷을 그대로 걸치고 있었다. 그가 기록관에게 무언가를 짚어 보이고, 기록관의 못이 세 번 짧게 돌을 두드렸다.

    소하는 그 세 번의 울림을 손바닥으로 받았다. 쉰넷. 은포 우물 쉰넷을 전부 다시 잰다는 뜻이었다. 왜 다시 재는지는 그 못자국 어디에도 없었다.

    은실 세 줄은 소하를 막지 않았다. 몸을 조금 비켜 우물 턱을 내주고, 오늘 일도 그에게는 재는 일 가운데 하나라는 듯 그저 지켜봤다. 소하는 그 시선을 등으로 느끼며 밧줄 앞에 다가섰다.

    기록관은 은실 세 줄 쪽을 향해서도 못을 한 번 두드렸다. 소하는 그 진동까지는 손에 닿지 않는 자리에 있어서 무엇이 새겨졌는지 알지 못했다. 그 한 자국만은 오늘 몫이 아니었다.

    소하는 밧줄 앞에 쭈그려 앉아 몸에 감아둔 것들을 하나씩 풀었다. 어머니가 매어준 매듭 실을 풀어 짐꾼 손에 쥐여주고, 젖은 흙에 적었던 헝겊 조각을 기록관 앞에 내려놓았다. 셈을 몸 밖에 두려고 지녔던 것들이 하나씩 없어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오른손 손목에 감긴 짧은 실 한 가닥이었다. 소하는 그것도 풀어 짐꾼의 지팡이 끝에 걸어 뒀다. 이제 몸에는 아무 표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우물 턱에 두 손을 짚고 몸을 기울였다. 왼손이 먼저 물기를 만났다. 소하는 소리 내어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 몸 밖에 두었던 셈을 거꾸로 저쪽 셈 안에 밀어 넣듯이.

    목소리는 점점 낮아지지만 입술은 계속 움직였다. 열, 열하나, 열둘. 우물 턱 돌의 냉기가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무릎이 꺾였다. 왼손과 오른손이 어느 쪽인지 잠깐 헷갈렸다. 흐려짐이었다. 소하는 그 헷갈림을 그대로 두고 세기만 이어 갔다. 어느 손이 저쪽에 서 있는지는 지금 확인할 셈이 아니었다.

    스물을 넘어서도 소하는 세기를 멈추지 않았다. 스물다섯, 스물여덟, 서른.

    서른을 세는 순간 몸통이 우물 턱 위로 반쯤 넘어갔다. 소하는 그 자세 그대로 버텼다. 넘어가려는 몸과 버티려는 몸이 같은 팔 안에서 다퉜다.

    서른에 닿는 순간, 밧줄 저쪽에서 무언가 물러났다. 안 뗀 손이 여울의 팔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소하는 자기 왼팔로 먼저 느꼈다. 붙잡을 것을 하나 더 얻은 저쪽이, 여울을 놓았다.

    밧줄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손바닥에 남은 마찰이 뜨겁게 얼얼했다. 짐꾼과 이름꾼이 동시에 밧줄을 당겼다. 우물 턱 위로 젖은 머리카락이 먼저 올라오고, 다음은 손끝, 다음은 몸 전체였다.

    여울이 마당 흙 위에 누웠다. 은실 두 줄이 코를 벌름거리다가 그대로 멈췄다. 넷을 내려보낸 뒤로 무슨 냄새를 맡아도 그 넷이 함께 났었는데, 이 사람에게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한낮 흙마당의 둥근 돌 우물 턱. 방금 끌어올려진 젖은 여자가 우물 옆 젖은 흙바닥에 누워 한 손을 들어 손가락을 반쯤 접고 있고, 그 위로 나이 든 여자가 무릎을 꿇고 그 손을 자기 뺨에 댄 채 움직이지 않는다. 뒤에서 지팡이를 짚은 늙은 짐꾼과 또 한 사람이 젖은 밧줄을 늘어뜨린 채 잡고 있고, 우물 턱 건너편에서 삼베옷 입은 젊은이가 두 손을 돌 위에 짚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담장 쪽에는 어깨에 색 띠를 두른 사람들이 물러서서 보고 있다.
    밧줄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여섯 해 만에 여울이 마당 흙 위로 올라왔다.

    은실 두 줄은 그 자리에 서서 몇 번이고 코를 벌름거려 봤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만 매번 확인했다.

    여울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계속 무언가를 세고 있었다. 하나씩 접었다 펴는 동작이 멈추지 않았다. 여섯 해 동안 놓지 않은 셈이었다.

    소하 앞에서 여울의 입술이 짧게 움직였다. 위, 입니까. 소하는 그 입 모양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울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세지 마십시오. 소하는 그 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손을 거뒀다.

    이름꾼이 여울 옆에 무릎을 꿇었다. 동생의 손을 잡아 자기 뺨에 가져다 대고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여울의 손가락은 이름꾼의 뺨 위에서도 잠깐 셈을 멈추지 않다가, 서서히 접힌 채로 굳었다.

    밧줄을 쥐고 있던 짐꾼도, 못을 쥔 기록관도, 그 자리에서는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마당에 남은 누구도 두 사람 쪽으로 더 다가서지 않았다.

    소하는 두 사람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이 자리는 온전히 두 사람의 몫이라는 것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소하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왼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팔은 그대로 어깨에 붙어 있는데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가벼웠다. 흙을 짚어도 축축한 감촉이 오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왼팔을 몇 번이나 눌러 봤다. 눌리는 모양은 눈에 보이는데 눌렸다는 느낌이 손끝까지 오지 않았다.

    흔적꾼이 다가와 소하의 팔뚝을 짚어봤다. 팔꿈치 위로는 못 읽겠습니다. 흔적꾼의 입술이 먼저 그렇게 움직였고, 뒤이어 팔뚝 아래로는 여울의 손자국이 사라지고 안 뗀 손이 옮겨 잡은 자국만 짙게 남았다고 짚었다.

    왼쪽에서 나는 것은 무엇이든 한 박자 늦게 왔다. 오른쪽 귀는 여전히 마당의 소리를 하나도 걸러내지 못하는데, 왼팔 쪽으로는 대신 다른 것이 걸렸다. 우물 밑에서나 오던 그 낮은 울림이, 지금은 마당 한복판에서도, 우물에서 멀찍이 떨어져도 그대로 걸려왔다.

    소하는 시험 삼아 우물에서 몇 걸음 물러나 봤다. 울림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왼팔 안쪽으로 더 또렷하게 모여들었다.

    밧줄이 완전히 늘어진 뒤, 손이 처음으로 낸 울림이 왔다. 이번엔 우물 밑이 아니라 소하의 왼팔 쪽에서 시작됐다. 소하는 실과 헝겊을 꺼내 그 울림을 옮기려다 손을 멈췄다.

    길이도 간격도 아니었다. 오는 것은 셈 그 자체였다. 저쪽에서 무언가를 세고 있고, 그 수가 하나씩 줄어들고 있었다.

    무엇의 수인지는 왼팔 어디에도 새겨지지 않았다. 기록관의 못조차 그 앞에서는 멈춰 있었다. 소하는 오른손으로 왼팔을 감싸 쥐어 봤다. 줄어드는 숫자는 그 손아귀 안에서도 멈추지 않고 흘러갔다.

    소하는 그 자리에 선 채, 마당의 빛이 우물 턱 위로 완전히 넘어올 때까지, 줄어드는 그 숫자만을 손끝 대신 팔 전체로 받아 세고 있었다. 하나가 줄어들 때마다 저쪽 어딘가에서도 무언가가 함께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소하는 아직 손에 잡히지 않는 채로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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