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려보낸 셈
소하는 눈을 뜨자마자 왼팔 안쪽부터 짚었다. 어제 마흔이던 것이 오늘은 서른아홉이었다. 짐꾼도 오지 않았고 어머니도 아직 실을 매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다.
방 안은 아직 어두웠고 마당 쪽에서 어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넣는 기척만 진동으로 왔다. 소하는 그 진동과 자기 왼팔의 수를 나란히 놓아보았다. 둘은 서로 상관없이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소하는 잠에서 덜 깬 발로 마당을 가로질러 우물 턱으로 갔고, 오른손 손가락으로 젖은 돌 위에 서른아홉을 세 번 그어 남겼다. 기록관은 이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늙은 몸이 이른 볕 아래 그림자를 짧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기록관이 손끝으로 소하가 그은 숫자를 짚었다. 그리고 못을 꺼내 우물 턱 돌에 같은 숫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소하는 못이 돌을 칠 때마다 오는 울림을 받았다. 늘 손바닥으로 오던 것이 오늘은 턱뼈까지 타고 올라왔다. 어금니에 닿는 진동이었다. 오래 받으면 이가 시릴 것 같은 낯선 울림이었다.
기록관의 손이 못을 쥔 채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소하는 그 멈춘 시간이 무엇을 뜻하는지 묻지 않고 다음 못질을 기다렸다. 돌 위에는 서른아홉이라는 자국만 남았고, 그 옆으로 아직 빈자리 하나가 나란히 비어 있었다.
한참 지나 늙은 짐꾼이 지팡이를 짚고 마당에 들어섰다. 지팡이 끝이 젖은 흙을 두 번 두드렸고 그 진동이 소하의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짐꾼이 입을 크게 벌려 천천히 움직였다. 시장 쪽 우물이오. 소하가 고개를 들자 짐꾼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다시 입을 벌렸다. 대장간 뒷골목 우물이오, 밤새 바닥을 보였소.
소하는 그 말이 자기 왼팔보다 늦게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왼팔의 서른아홉은 이미 새벽에 와 있었는데, 그 우물이 마른 소식은 해가 중천에 걸리고서야 왔다. 어제와는 순서가 반대로 뒤집혀 있었다. 어제는 우물이 먼저 마르고 왼팔이 나중에 줄었는데, 오늘은 왼팔이 먼저 줄고 우물 소식이 뒤따라왔다.
어머니가 아궁이 앞에서 실을 매듭짓던 손을 멈추고 마당 쪽을 보았다. 매듭은 늘 짓던 자리보다 하나 더 늘어나 있었다. 소하는 그 늘어난 매듭이 무엇을 뜻하는지 묻지 않고 손끝으로 한 번 훑어만 보고 놓았다.
은실 세 줄이 마당 가장자리에서 그 순서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소하는 그가 기록관 쪽으로 손짓하는 것을 보고서야 알았다. 은실 세 줄이 손가락 두 개를 세워 나란히 붙였다. 기록관이 그 뜻을 읽고 우물 턱 돌에 새 줄을 팠다 — 왼팔의 수와 우물의 수를 앞으로 나란히 새긴다는 표시였다. 소하는 그 새긴 홈을 손끝으로 읽으며 자기 팔이 처음으로 남에게 쓸모가 된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소하는 마당 끝에서 우물까지 걸음을 세어보려 했다. 하나, 둘, 셋까지는 오른손 손가락을 접었는데 열을 넘기자 앞의 수가 지워진 것처럼 캄캄해졌다. 어제까지도 되던 셈이 오늘은 손가락을 접는 순간 앞자리부터 흩어졌다. 소하는 걸음을 세는 일조차 자기 것으로 못 붙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몇 번을 다시 걸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소하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오른손을 펼친 채 무엇을 세었는지 되짚으려 했지만 손가락에 남은 것은 방금 접었다는 감각뿐, 숫자는 이미 빠져나간 뒤였다.
길꾼이 그 모습을 마당 저편에서 보고 있다가 다가왔다. 남색 띠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흔들렸다. 길꾼은 자기 걸음은 못 세지만 남의 걸음은 정확히 센다고 알려진 사람이었고, 소하 앞에 서서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소하가 걸었던 자리를 되짚었다. 어제 스물여덟이던 것이 둘 늘어 서른이라고 손가락으로 보여줬다.
길꾼은 값을 부르지 않았다. 계 사람은 셈을 대신 해주고 값을 부르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오늘 길꾼의 손은 값 대신 마른 우물 자리를 하나씩 짚어보고 있었다. 굳은살이 새로 박인 손바닥이 흙바닥을 스칠 때마다 조금씩 방향을 바꿔가며 짚었다.
길꾼의 발치에는 어제 짚었던 자리보다 얕은 발자국이 새로 나 있었다. 소하는 그 발자국의 깊이가 다르다는 것만 알아챘고, 왜 다른지는 묻지 않았다.
길꾼은 열다섯 자리를 하나씩 짚어가며 그 사이 거리를 손가락으로 되짚었다. 어느 자리도 두 번 같은 방식으로 짚지 않았다. 소하는 그 손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묻지 않았고, 길꾼도 알리지 않았다. 값을 부르지 않는 계 사람 앞에서 소하는 그저 기다렸다.
기록관이 길꾼의 손가락 수를 받아 서른을 새겼다. 소하는 그 옆에서 밧줄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 젖은 자리가 어디까지인지 손끝으로 확인했다. 어제 스물하나에서 끝나던 물기가 오늘은 스물두 번째 매듭까지 올라와 있었다. 매듭을 하나씩 넘길 때 손끝에 걸리는 축축한 감촉만이 소하가 그 순간 확실히 붙잡은 것이었다.
여울이 우물 턱 옆에 앉아 손가락으로 허공을 세고 있었다. 소하는 그 앞에 마주 앉아 오른손을 내밀었다. 여울의 손가락이 접히고 펴지는 순서를 소하는 눈으로 좇았는데, 어제처럼 그 수를 머릿속에 쌓지 않고 왼팔 쪽으로 그대로 흘려보냈다. 무언가를 세는 대신 세지 않고 넘기는 쪽을 골랐다.
소하는 열 해 동안 남이 시킨 삼태기 수와 줄 선 순서를 대신 세어 온 손이었다. 남의 값을 자기 머릿속에 쌓아 넘겨주는 것이 그 손이 하던 일이었는데, 오늘은 쌓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내는 손이 되어 있었다. 열 해 걸려 몸에 밴 습관이 뒤집히는 데는 마당에서 보낸 열엿새면 됐다.
몸이 흔들리는 느낌이 왔다. 손 좌우가 뒤바뀐 것처럼 느껴지고 무릎이 한 번 꺾였는데 그 흔들림은 어제의 서른둘보다 훨씬 얕았다. 기록관이 옆에서 그 흔들림의 크기를 열넷이라고 새겼다. 소하는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도 방금 여울에게서 받은 수가 무엇이었는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수는 왼팔을 타고 어딘가로 흘러갔고 소하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남은 것은 기록관이 돌에 새긴 못자국 하나뿐이었다. 소하는 오른손으로 그 못자국을 짚어보며 자기가 방금 무엇을 옮겼는지 자기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여울이 손가락 셈을 멈추고 우물 턱 돌 쪽으로 몸을 돌렸다. 기록관이 어제 새겨 둔 두 줄이 그 자리에 있었다. 여울은 손끝으로 첫째 줄을 짚었고, 그다음 손끝을 옆으로 옮겨 둘째 줄을 짚었다. 손끝이 셋째 자리에 이르렀을 때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여울의 손끝이 그 빈자리를 몇 번이고 되짚었다.
소하는 그 옆에 앉아 여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궤적만 보고 있었다. 여울은 울지 않았고 손을 떨지도 않았다. 여섯 해를 셈만 하고 지낸 사람에게 빈 줄은 채워야 할 자리였고, 여울의 손끝은 그 자리를 마치 아직 답이 안 나온 셈처럼 몇 번이고 짚고 있었다.
돌은 볕을 받아 따뜻했지만 새겨진 홈 안쪽에는 그늘이 남아 있었다. 여울의 손끝이 그 그늘진 홈을 따라 둘째 줄 끝까지 갔다가 다시 셋째 자리의 빈 돌로 돌아왔다. 소하는 그 왕복이 몇 번째인지 세지 않았다.
여울의 손끝이 세 번째로 그 빈자리를 짚었을 때 손가락이 아주 잠깐 멈췄다. 소하는 그 멈춤이 얼마나 길었는지도 세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이름꾼이 마당 안쪽에서 그 모습을 보다가 다가와 여울 옆에 앉았다. 이름꾼의 손이 밧줄 매듭을 짚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자기 손목 안쪽, 오래전 표가 걸려 있던 자리를 짧게 짚었다. 표를 잃은 손으로는 동생의 기록을 되살릴 수 없다는 것을 이름꾼은 그 손짓 하나로 끝냈다.
여울이 손가락 세 개를 세워 보이고는 마당 가운데를 가리켰다. 소하는 그 뜻을 읽지 못해 기록관을 돌아봤다. 기록관이 여울의 입 모양과 손짓을 읽고 돌에 새겼다 — 내일 마당에 서겠다는 뜻이었다. 죽은 것으로 적힌 사람이 산 사람들 앞에 서면 관이 무언가는 적어야 한다는 셈을, 여울은 손가락 세 개로 이미 끝내 놓은 뒤였다.
기록관은 그 자리에서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않았다. 대신 못을 들어 새 줄을 새겼다. 이런 경우를 다루는 규정이 없다. 소하는 그 문장이 허락도 금지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여울은 그 새긴 자국을 손끝으로 한 번 쓸어본 뒤 일어섰다.
해가 기울 무렵 마당에 나무패가 걸리기 시작했다. 내일 아홉 살이 되는 아이들의 이름이 먹으로 적혀 있었다. 소하는 그 패들 앞을 지날 때마다 오른손을 등 뒤로 돌려 왼손과 함께 붙잡았다. 젖은 손이 스치면 먹이 통째로 풀린다는 것을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패는 모두 열하나였다. 은실 세 줄이 패 앞을 오가며 손가락으로 수를 짚어 확인했고, 계 사람들은 아직 마당 뒤쪽 그늘에 자리를 잡는 중이었다. 적기 전에 값을 부르는 것은 금지였으므로 색 띠를 두른 사람들은 팔짱을 낀 채 그늘 안에서만 서 있었다.
은실 두 줄도 그 그늘 끝에 서 있었다. 표 없는 사람이라 그늘 안쪽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가장자리에 붙어 패 쪽을 보고 있었다. 소하는 그 자리가 그늘의 안과 밖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자리라는 것을 지나가며 눈으로만 확인했다.

단 위에는 놋그릇과 물사발, 마른 나뭇가지 한 단이 놓여 있었다. 볕에 데워진 나뭇가지에서 여름 마당과는 어울리지 않는 냄새가 올라왔다. 겨울 냄새였다. 마르고 찬 계절이 담긴 냄새가 한여름 마당 한가운데서 조용히 퍼지고 있었다.
소하는 그 단 앞을 지나며 나뭇가지에 손을 대지 않았다. 냄새만으로도 그것이 이 마당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냄새를 맡는 동안만은 왼팔의 수도 잠깐 뒤로 밀려나 있었다.
소하는 젖은 흙 위에 오른손으로 물음을 적었다. 열다섯이 마른 것을 관은 언제부터 알았습니까. 은실 세 줄이 그 글자를 내려다보다가 젖은 흙에 자기 손가락으로 답을 눌러 적었다. 첫 번째가 마른 날부터.
소하는 그 답 아래 다시 적었다. 여섯 해 전입니까. 은실 세 줄이 고개를 끄덕이고 한 글자를 더 눌렀다. 종이. 그리고 손끝으로 관 쪽 건물을 가리켰다. 그 여섯 해를 세어 온 종이가 관 안에 있다는 뜻이었다. 소하가 왜 다시 재느냐고 다음 글자를 쓰려 하자 은실 세 줄은 이미 몸을 돌려 패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소하는 젖은 흙에 반쯤 쓰다 만 글자를 내려다봤다. 관은 여섯 해 전 첫 번째 우물이 마른 것을 알면서도 그 뒤로 미정을 계속 우물 밑으로 내려보냈다는 뜻이 그 답 안에 들어 있었다. 소하는 그 사실을 오른손으로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기록관이 그 옆에 다가와 소하가 쓴 글자와 은실 세 줄이 누른 답을 함께 돌에 옮겨 새겼다. 두 사람의 말이 나란히 새겨지는 동안 소하는 그 돌 위에 손을 얹고 어금니로 오는 울림을 다시 한번 받았다.
밤이 되어 소하는 다시 왼팔 안쪽을 짚었다. 서른아홉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수가 두 번 왔다. 늘 오던 자리에서 한 번, 그리고 한 박자 늦게 또 한 번.
소하는 손을 거두지 않고 그대로 기다려보았다. 두 번째 울림이 첫 번째와 똑같은 서른아홉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에도 그 사이에 놓인 짧은 간격은 사라지지 않았다.
방 안의 불빛이 흔들렸고 소하의 그림자도 따라 흔들렸다. 왼팔 안쪽의 두 울림은 그 흔들림과는 상관없이 그대로 있었다.
소하는 오른손으로 왼팔 안쪽을 짚어 두 울림 사이의 거리를 재보려 했다. 손끝이 팔을 따라 오르내렸지만 두 울림은 나란히 겹치지도, 완전히 떨어지지도 않은 채 서로의 꼬리를 밟고 있었다. 소하는 손끝을 멈추지 않고 그 사이를 계속 짚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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