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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성이 없어서 벽을 지납니다
    22화 · 2026년 9월 17일

    뒤쪽 그늘

    새벽에 소하는 눈을 뜨자마자 왼팔 안쪽부터 짚었다. 어제 서른아홉이던 것이 오늘은 서른여덟이었다. 손끝에 닿는 감촉만으로 하나가 줄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물 하나가 밤새 또 말랐다는 뜻이었다. 소하는 그 자리를 다시 한번 눌러 확인했다. 줄어드는 쪽으로만 움직이는 수였다.

    소하는 몸을 일으켜 마당으로 나갔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마당은 파랗게 가라앉아 있었다. 젖은 돌 위에 오른손으로 금을 그었다. 뒤따라온 기록관이 그 옆에 못을 대고 두드렸다. 못 끝이 돌을 칠 때마다 울림이 손끝을 타고 어금니까지 올라왔다.

    어머니는 이미 아궁이 앞에 앉아 실을 매듭짓고 있었다. 어제보다 매듭이 하나 늘어 있었다. 소하는 그 매듭에 손끝을 대 보았다. 실이 팽팽하게 당겨진 채로 묶여 있었다. 소하는 그 수를 세다가 곧 손을 내렸다. 어머니가 아궁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움직였다. 밥 먹고 가라. 소하는 절반만 읽었지만 나머지는 읽지 않아도 알았다.

    마당으로 나서기 전에 소하는 두 손을 등 뒤로 모아 잡았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늘 그렇게 했다. 손등을 맞대고 손가락을 얽어 쥐면 어느 손이 어디에 닿는지 스스로도 잊을 수 있었다.

    집에서 관 마당까지는 좁은 골목을 따라 백 걸음이 조금 넘었다. 소하는 그 걸음도 세다가 중간에 놓쳤다. 골목 어귀에서 늙은 짐꾼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가 소하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지팡이 끝이 두드린 돌바닥의 진동만이 소하에게 온전히 닿았다.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마당이 찼다. 나무패 열하나가 단 앞에 나란히 놓였다. 아이들과 부모들이 그 뒤로 둘러섰고, 색 띠를 두른 계 사람들은 뒤쪽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소하는 그 그늘의 가장자리에 섰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자리였다. 열 해 전 소하가 저 단 앞에 섰을 때는 지금 자기가 선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지 못했다.

    소하에게는 사람 백 명이 모인 마당도 조용했다. 발을 구르는 진동이 발바닥으로 올라왔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아이를 부르는 입 모양들이 여기저기서 빠르게 열리고 닫혔지만 소하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몇 개 되지 않았다.

    단 위에 놓인 물사발에도 잔물결이 일었다 잦아들었다. 소하는 그 잔물결의 간격이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는 것으로 마당이 웅성거리고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열 해 전 그날도 이 사발은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을 텐데, 그때 소하는 단 앞에 서 있었으므로 사발 안쪽을 들여다볼 일이 없었다.

    은실 세 줄이 단으로 다가가 놋그릇과 나뭇가지 단과 물사발의 자리를 손끝으로 하나씩 짚어 확인했다. 그릇 하나를 살짝 옮겼다가 다시 원래 자리에 되돌려놓기도 했다. 세 번 확인한 뒤에야 그늘로 돌아가 앉았다. 은실 두 줄은 그 곁에 앉지 못하고 그늘이 끝나는 선에 발끝을 걸친 채 서 있었다. 기록관이 단 옆에 자리를 잡고 못과 망치를 무릎 앞에 내려놓았다.

    첫 번째 아이가 마른 나뭇가지 단 앞에 섰다. 손을 펴고 서 있는 동안 가지 끝이 저 혼자 젖어들었다. 마른 가지에 물기가 배어드는 것을 아이의 부모가 먼저 알아채고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기록관이 돌에 못을 댔다.

    두 번째 아이는 놋그릇 앞에 섰다. 그릇이 울렸다. 소리는 소하에게 오지 않았지만 그릇 테두리에 이는 떨림이 단 다리를 타고 흙을 건너 발바닥까지 왔다. 소하는 그 떨림이 잦아드는 동안 발을 옮기지 않고 그대로 받았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다섯 번째 아이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지나갔다. 한 아이의 손등에 없던 무늬가 떠올랐고, 다른 아이 앞에서는 놓인 물그릇의 물이 결을 이루며 갈라졌다. 또 다른 아이 앞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이다가, 아이가 서 있던 자리의 흙만 유독 단단하게 다져져 있었다.

    여섯 번째쯤이었을 것이다. 소하는 아이들이 나오고 물러나는 순서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세고 있었는데, 열을 넘기자 앞자리부터 흩어졌다. 여섯인지 일곱인지 분간이 안 됐다. 다시 세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소하는 등 뒤에 잡은 손을 풀고 젖은 돌의 못자국을 짚었다. 기록관이 새긴 자국은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소하는 그 자국을 하나씩 짚어가며 순서를 되찾았다. 다섯째 홈부터 다시 세기 시작하자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손끝에 남은 것은 돌에 새겨진 자국뿐이었고, 소하 자신이 세던 수는 이미 빠져나간 뒤였다.

    여덟 번째 아이가 손을 펴고 선 채로 유독 한참을 서 있었다. 그동안 단 위의 물사발에서 물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느렸지만 곧 사발 안쪽 벽에 젖은 자국만 남기고 물이 다 빠졌다.

    마당 전체가 그 물사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발 바닥이 마침내 드러났을 때는 아이의 부모조차 아이보다 그릇을 먼저 봤다. 소하는 왼팔을 짚었다. 새벽에 이미 받아 둔 수였다. 마당 한복판에서 방금 마른 것을 소하는 해가 뜨기 전에 혼자 받아 들고 골목을 걸어 내려왔던 셈이었다. 소하는 등 뒤로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은실 세 줄이 그늘에서 고개를 돌려 소하 쪽을 보았다.

    해 뜰 무렵 돌바닥 마당. 낮은 나무 단 위에 작은 놋그릇과 묶어 세운 마른 나뭇가지 한 단, 그리고 물이 빠져 바닥이 드러난 넓은 사발이 놓여 있다. 단 앞에 삼베옷 입은 아이가 두 손을 펴고 서 있고 마을 사람들이 둥글게 둘러서서 보고 있다. 오른쪽 처마 그늘에는 어깨에 색 띠를 두른 사람들이 걸상에 앉아 있고, 그 앞에서 늙은 기록관이 무릎을 꿇고 못과 망치를 들어 돌 턱에 새기고 있다.
    여덟 번째 아이가 손을 편 동안 사발의 물이 빠졌다. 마당 전체가 그것을 봤다.

    아홉 번째 아이는 그림자가 한 박자 늦게 따라왔다. 열 번째 아이는 매고 있던 끈이 저절로 매듭지어졌다. 열한 번째 아이 앞에서는 놋그릇 안쪽에 김이 서렸다가 걷혔다. 계 사람들은 아이가 적힌 뒤에야 그늘에서 일어나 값을 불렀다.

    열한 개의 나무패가 전부 먹으로 채워졌다. 은실 세 줄이 그늘에서 일어나 단 앞으로 걸어 나왔다. 패를 손끝으로 하나씩 짚어 세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세고, 다시 끝에서 처음으로 세었다. 두 번 다 열하나였다.

    소하는 그 손이 세 번째로 첫 패에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오늘 은포에 새로 적힌 이름은 열하나였고 그 안에 미정은 없었다. 은실 세 줄의 손이 패에서 떨어졌을 때 그 손은 그늘 가장자리, 소하가 선 자리를 한 번 짚었다. 그리고 마당 건너편, 이름꾼 옆에 앉은 여울 쪽으로 옮겨 갔다. 쉰넷을 다시 재려면 사람이 더 있어야 했는데 오늘 아침보다 늘어난 사람은 없었다.

    소하는 등 뒤로 잡은 손을 더 단단히 쥐었다. 손등의 뼈가 서로 눌리는 감각만 또렷했다.

    이름꾼은 부모들 뒤쪽에 서서 그 모두를 지켜보고 있었다. 소하는 그 손이 옷자락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것을 곁눈으로 보았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며 그늘의 경계가 좁아지고 있었다. 소하가 선 자리도 그 경계를 따라 반 걸음쯤 밀려났다.

    마당이 잠시 술렁이는 틈에 무명이 소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 채였다. 입을 크게 벌려 천천히 움직였다. 이런 걸 처음 보오.

    무명이 손가락으로 허공에 다리 하나를 그리듯 길게 그었다. 그쪽에도 세는 사람이 있었소, 다리 널을 세는 사람. 그 사람은 세는 자리에서 못 떠났소. 걷히는 수가 늘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말도 입 모양으로 덧붙였다.

    소하는 그 말을 입술로 두 번 짚어 읽었다. 무명의 입은 짐꾼처럼 크게 벌어졌다가 기록관처럼 다시 좁아졌다. 소하는 그 좁아지는 입 모양에서 마지막 한 마디를 놓쳤고, 무명이 손가락으로 같은 자리를 한 번 더 그어 준 뒤에야 뜻을 다시 붙잡았다.

    그 곁으로 길꾼이 다가와 손가락을 접어 보였다. 서른하나. 소하가 아침부터 젖은 마당을 오가며 걸은 걸음이었다. 남색 띠를 두른 길꾼은 요즘 값을 부르지 않고 손가락만 접어 보였다. 소하는 그 손가락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자기 걸음은 열을 넘기면 앞자리부터 흩어졌으므로, 남는 것은 늘 남이 대신 접어 주는 손가락뿐이었다.

    소하는 그 수를 머릿속에 쌓지 않고 왼팔로 흘려보냈다. 흐려짐은 열넷에서 더 커지지 않았다. 팔 안쪽이 잠깐 서늘해졌다가 가라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울림이 왔다. 늘 오던 자리에서 한 번, 한 박자 늦게 또 한 번. 소하는 손을 멈추고 그 수를 짚었다. 서른여덟이 아니라 서른하나였다.

    소하는 두 수를 나란히 놓아 보았다. 서른여덟은 새벽부터 팔에 있던 수였다. 서른하나는 방금 놓아 보낸 수였다. 두 번째 울림은 방금 흘려보낸 그 수를 그대로 따라왔다.

    소하는 다시 시험했다. 이번에는 밧줄에 걸린 젖은 매듭 스물셋을 떠올려 머릿속에 쌓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냈다. 두 번째 울림이 다시 왔다. 스물셋이었다.

    소하는 오른손 손끝으로 왼팔을 몇 번이고 짚어 보았다. 서른하나를 흘려보내면 서른하나가 돌아왔고 스물셋을 흘려보내면 스물셋이 돌아왔다. 어긋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소하는 손끝을 팔뚝 위에서 천천히 움직여 두 수가 왔던 자리를 각각 짚어 보았다. 같은 살갗인데도 짚는 순서에 따라 서늘함이 다르게 느껴졌다.

    소하는 왼팔 안쪽에 오른손을 얹은 채 손을 멈췄다. 등 뒤로 잡았던 손을 언제 풀었는지도 몰랐다. 옆에서 무명이 무어라 입을 움직였지만 소하는 그쪽을 보지 않았다.

    마당이 흩어지려는 기색을 보일 무렵 이름꾼이 몸을 반쯤 일으키다가 멈췄다. 그 손이 다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여울이 마당을 가로질러 단 앞에 섰다. 손가락은 여전히 허공에서 무언가를 세고 있었다. 손을 펴고 서는 순간 그 손가락도 멈췄다.

    발바닥으로 오던 진동이 한꺼번에 멎었다. 정강이를 타고 오르던 잔떨림이 뚝 끊기며 서늘한 기운이 발등을 덮었다. 마당에 모인 사람들의 발 구르는 기척도, 물사발이 놓였던 자리의 떨림도 전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백 명 넘는 발이 동시에 멈춘 자리에 소하는 한 번도 서 본 적이 없었다. 옆에 앉은 무명도 세운 무릎에서 손을 떼고 단 쪽을 바라보았다.

    기록관이 못을 들었다. 은실 세 줄은 그늘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은실 두 줄도 발끝을 걸친 자리에서 그대로였다. 소하는 두 손을 다시 등 뒤로 모아 잡았다.

    여울은 열을 셀 동안 손을 편 채 서 있었다. 마른 나뭇가지는 젖지 않았고 놋그릇은 울리지 않았다. 물사발은 이미 비어 있었다. 기록관의 못이 돌 위에 닿은 채로 멈춰 있었다.

    하나, 둘. 소하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접어가며 그 멈춤을 세고 있었다. 셋에서 넷으로 넘어갈 즈음 손가락이 다시 흩어졌다. 소하는 손가락 대신 기록관의 손목을 보았다. 못을 쥔 손목은 미동도 없었다.

    그때 소하의 왼팔로 두 번째 울림이 왔다. 오늘 흘려보낸 어느 수도 아니었다. 서른하나도 스물셋도 아닌 낯선 수였다. 소하는 등 뒤에서 손을 풀어 오른손으로 왼팔 안쪽을 짚은 채 그 수를 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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