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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성이 없어서 벽을 지납니다
    23화 · 2026년 9월 17일

    물이 있는 우물

    기록관의 못이 돌 위에서 다시 움직였다.

    여울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새긴 자국은 짧았다. 오늘 날짜, 그 아래 한 줄. 죽은 것으로 지우는 대신 오늘 다시 적는다는 뜻이었다.

    기록관의 입술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소하는 그중 한 마디만 겨우 읽어냈다. "다시." 나머지 말은 흩어졌고, 그 뒤에 무슨 말이 더 있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소하는 그 옆에 새로 판 자국을 마저 짚었다. "재적된 자는 처음부터 다시 잰다." 그 한 줄이 전부였고, 이의를 적는 자리는 아예 파여 있지 않았다.

    이름꾼이 한 걸음 나섰다. 손이 여울의 어깨 쪽으로 갔다가, 닿기 전에 접혔다.

    이름꾼의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이번엔 또렷했다. 소하는 그대로 읽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여울은 아직," 그다음 말은 목이 메었는지 입술이 아예 멈췄다.

    여울은 그 손을 보지 않았다. 허공을 세던 손가락도 함께 멈춰 있었다.

    소하는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왼팔로 들어온 울림은 이미 끝난 뒤였고, 되짚을 수 있는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기록관이 서판을 접었다. 오늘부로 여울은 두 번째 미정이었고, 관은 다시 재러 내려보낼 명분을 새로 얻었다.

    마당의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소하는 늦게까지 그 자리에 남아 돌 위의 새 자국을 손끝으로 짚었다. 자국은 낮의 소란과 달리 조용했다.

    발밑으로 오는 진동은 더 이상 없었다. 소하는 그런데도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밤에 소하는 왼팔로 다시 그 울림을 짚었다.

    낮에 온 것과는 결이 달랐다. 오늘 흘려보낸 어느 수와도 맞지 않았다.

    소하는 그 수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여섯을 넘기자 앞자리부터 벌써 흐려졌다. 손끝에 남은 것은 방금 지나간 수의 그림자뿐이었다.

    소하는 손을 뻗어 우물 턱의 못자국을 짚었다. 자국은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순서를 되짚어 세자 처음 것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제야 흐려짐이 걷혔고, 수는 다시 손끝에 또렷하게 붙었다.

    그 수는 서른일곱도 아니었고 스물넷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수였다.

    소하는 그 수가 온 방향을 손끝으로 되짚었다. 짚을수록 한쪽으로 모였다. 우물 쪽이 아니었다. 여울이었다.

    여울도 흘려보내는 쪽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어제 단 위에서 열을 세던 중 손가락이 멈췄던 순간, 그때였다.

    소하는 그 그림을 오래 짚고 있었다. 저쪽에 둘이 나란히 서서 서로의 수를 재어 주는 그림이었다.

    손끝에 남은 것은 둘이라는 것 하나뿐이었다.

    소하는 그 밤 내내 왼팔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몇 번이고 다시 짚어 그 수가 그대로인지 확인했다.

    다음 날 아침, 소하는 왼팔부터 짚었다. 서른일곱이었다.

    기록관은 이미 새벽에 돌에 새겨 두었다. 서른여덟이었다.

    하나가 비었다.

    우물가 젖은 흙에는 낯선 글씨가 남아 있었다. 여울의 손이었다. "같이 잽니다." 소하는 그 위에 손끝을 얹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여울이 그 글씨 옆에 와서 앉았다. 밤새 마당에 있었던 사람처럼 옷자락 아래가 젖어 있었다.

    여울의 입술이 짧게 움직였다. 소하는 그대로 읽었다. "반씩입니다." 손가락 둘을 펴 보였다가 다시 접었다.

    소하는 그 뜻을 알았다. 둘이 나눠 세면 한 사람이 치르는 것이 절반이 된다는 말이었고, 여섯 해를 혼자 센 사람이라면 그렇게 셈하는 것이 당연했다.

    소하는 그 옆에 답을 적지 않았다. 나눠 세는 만큼 저쪽으로 건너가는 수가 두 배가 된다는 것을, 어젯밤 손끝에 둘이라는 것 하나만 남았을 때 이미 알아 버린 뒤였다.

    여울의 손가락이 다시 허공을 세기 시작했다. 소하는 그 손가락을 눈으로 좇다가 여섯을 넘기고 놓쳤다.

    소하는 그 자리에 서서 어느 쪽이 맞는지 생각했다. 생각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소하의 셈은 열을 넘기면 앞에서부터 흩어졌다. 오늘 것은 아홉도 못 되어 벌써 위태로웠다.

    머릿속으로 맞춰 볼 방법은 없었다. 남는 길은 하나, 우물을 직접 짚어 보는 것뿐이었다.

    소하는 그 생각 끝에 다른 것을 알아차렸다. 왼팔이 저쪽에 선 뒤로 소하는 늘 받기만 했다.

    입술을 읽었고, 못자국을 짚었고, 매듭을 세었다. 스스로 무언가를 짚으러 나선 적은 없었다.

    잃은 것은 왼팔의 감각이었다. 짚는 힘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소하는 첫 우물 앞에 섰다. 눈을 감고 왼손을 물가에 댔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좁아지는 사이가 거기 있어도, 감각 없는 손은 그 좁아짐을 붙잡지 못했다.

    손을 거두고 이번엔 이마를 물가 돌에 댔다. 사이의 한쪽은 여전히 소하 자신이었으니 규칙은 어기지 않은 셈이었다.

    소하가 낡은 돌우물 앞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이끼 낀 젖은 돌 턱에 붙인 채 눈을 감고 있다. 두 팔은 양옆으로 늘어뜨렸고, 머리 옆 우물 안에는 물이 그득히 고여 있다. 마당은 비어 있고 젖어 있다.
    이마는 좁아지는 것을 세기는 했지만 붙잡아 둘 자리가 없었다.

    무릎을 꿇은 채로 오래 있었더니 다리가 저렸는데 소하는 그것도 개의치 않고 이마에 오는 것에만 매달렸다. 그런데도 되지 않았고, 소하는 그 이유를 셈으로 짚어 냈다. 이마는 좁아지는 것을 셀 수는 있어도 그 수를 붙잡아 둘 자리가 없었다. 세는 것과 붙잡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소하는 마지막으로 오른손을 물가에 댔다. 눈은 여전히 감았다.

    사이가 좁아졌다. 소하는 그 좁아짐을 손끝으로 붙잡았다.

    물결이 손끝에 닿는데 한 박자 늦게 밀려 올라왔다. 처음 겪는 감촉이었다.

    물은 그대로 있었다. 마른 우물이 아니었다.

    소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 우물로 옮겨 갔다. 같은 손으로 짚을 때마다 같은 늦음이 왔다.

    세 번째 우물도, 네 번째 우물도 마찬가지였다. 늦음은 우물마다 결이 조금씩 달랐지만 있다는 것만은 같았다. 소하는 몇 번이고 손을 거두었다 다시 대며 그 늦음을 확인했다.

    관이 마른 것으로 세어 넘긴 우물들이 전부 그 늦게 반응하는 우물이었다.

    마른 것이 아니라 저쪽과 닿음을 잃은 우물이었다.

    둘은 여태 같이 움직여 왔다. 그래서 아무도 둘을 갈라 보지 않았다.

    오늘은 갈라졌다. 소하의 팔이 맞았고, 관의 못자국이 틀렸다.

    기록관이 다가와 소하의 손을 오래 보았다. 그다음엔 손이 짚고 지나간 우물들의 자리를 하나씩 다시 짚어 보았다.

    기록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판을 쥔 손이 한 번 멈췄다.

    기록관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하는 두 마디 걸러 한 마디씩 받았다. "물이 있는 것은 마른 것으로 치지 않습니다." 그다음이 한동안 뭉개졌다가 끝만 다시 잡혔다. "…이백 년 그렇게 세었습니다."

    소하는 젖은 흙에 오른손으로 적었다. "물이 있어도 닿음을 잃습니다."

    기록관이 그 글자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움직인 입술은 앞머리가 또렷했다. "그것을 무엇으로 압니까."

    소하는 그 아래에 한 줄 더 적었다. "손으로 압니다. 눈으로는 못 가립니다."

    기록관은 오래 서 있었다. 그동안 마당에서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소하는 자기가 적어 놓은 두 줄이 마르는 것만 손끝으로 지켜보았다.

    이제 관은 눈으로 이 우물들을 가려낼 수 없었다.

    기록관이 우물 턱에 새로 못자국을 냈다. 소하는 손끝으로 그 자국을 짚었다. "손으로 짚은 것은 증거로 삼지 않는다." 규정은 그대로였고, 오늘 소하가 짚은 것과는 맞지 않았다.

    소하는 그 규정과 자신이 짚은 것 사이에 낀 채로 앉아 있었다. 어느 쪽도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기록관이 새 못자국을 하나 더 남겼다. 소하는 그것도 짚었다. "대조는 매일 새벽에 한다." 자국은 다른 것들보다 유난히 깊게 파여 있었다.

    소하는 그 자리에 앉아 젖은 흙에 오늘 짚은 우물의 수를 적었다.

    손끝이 흙에 닿는 느낌이 늦게 왔다. 왼팔이 갔던 길을 오른손이 따라가고 있었다.

    소하는 그 늦음을 셈으로 짚었다. 처음 짚었을 땐 한 박자, 오늘은 그보다 조금 더 늦었다.

    오른손은 소하가 말을 쓰는 유일한 손이었다. 짚을 때마다 그 손으로 쓰는 말도 함께 늦어질 것이었다.

    셈은 간단했다. 짚는 만큼 손이 늦어졌고, 손이 늦어지는 만큼 말도 늦어졌다.

    소하는 그 자리에서 손끝을 다시 흙에 대었다. 늦어짐이 어디까지 왔는지 재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늙은 짐꾼이 지팡이를 짚고 다가왔다. 지팡이 끝이 돌바닥을 두 번 두드렸고 그 진동이 소하의 발바닥으로 올라왔다.

    짐꾼의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소하는 어렵지 않게 읽었다. "시장 쪽 것은 물이 그득하오." 지팡이로 서쪽을 가리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두레박 줄이 밤새 마르오. 물에 담가 둔 줄이오."

    소하는 그 말을 흙에 옮겨 적어 두었다. 물은 있는데 담가 둔 줄이 마르는 우물은, 오늘 소하가 손끝으로 늦게 오는 것을 잡은 우물들과 같은 자리였다.

    은실 세 줄이 소하 앞에 섰다. 다섯 번의 만남 동안 손짓과 흙글씨뿐이었다.

    이번엔 입술이 움직였다.

    소하는 그 입술을 읽었다. "그 손이 관보다 빠르다는 것을, 오늘 저 우물들 앞에서 분명히 보았습니다." 목소리를 누른 힘이 그대로 입술에 실려 있었다.

    은실 세 줄이 손끝으로 소하의 오른손을 가리켰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는 이 손으로 우물 전부를 다시 짚고, 결과는 매일 보고하십시오." 말끝이 단단하게 다물렸다.

    소하는 대답 대신 손끝으로 젖은 흙에 적었다. "오늘 열둘을 짚었습니다."

    은실 세 줄이 그 수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다시 입술이 움직였다. "이백 년 동안 관이 눈으로 세어 온 것을, 오늘 손 하나가 뒤집었습니다." 잠깐 멈췄다가 다시 벌어졌다. "이 손이 없으면 관은 앞으로 우물을 셀 수," 거기서 고개를 돌렸다. 나머지는 읽을 수 없었다.

    소하는 그 뒷말이 무엇이었는지 되짚어 보지 않았다. 짐작이 가는 순간 손끝이 먼저 식는 것 같았다.

    은실 세 줄은 몸을 돌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위에 그대로 전합니다.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우물을 벗어나지 마십시오." 이번엔 짧고 분명했다.

    소하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손끝으로 흙 위 수를 한 번 더 눌러 적었다.

    밤에 어머니가 방문 앞에 앉았다.

    실을 꺼내 매듭을 지었다. 스물넷.

    소하는 그 수를 세며, 어제 그늘 끝에 서 있던 것을 어머니가 안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캐묻지 않았다. 매듭을 마저 짓고서야 입술을 움직였다.

    소하는 앞머리만 읽었다. "우물 곁에는 오래 서 있지 말고 해 지기 전에 들어오," 그 뒤는 너무 빨리 움직여 놓쳤다.

    어머니는 실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지방을 넘기 전에 다시 입술이 짧게 움직였다. 소하는 그 앞머리 한 마디만 읽었다. "그리고," 문이 이미 닫히고 있었다.

    방문이 닫히는 진동이 손바닥까지 짧게 왔다.

    소하는 그 매듭을 손끝에 다시 걸어 보았다. 스물넷은 그대로였고, 흐려지지 않았다.

    이름꾼이 우물가에 와서 소하 옆에 섰다. 발소리는 여전히 나지 않았다.

    이름꾼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소하는 그대로 읽었다. "저 애는 여섯 해를 혼자 셌습니다." 잠깐 멈췄다가 다시 벌어졌다. "이번에는 둘이 셉니다." 그 말끝에 이름꾼은 소하를 보지 않았다.

    은실 두 줄은 어제까지 그늘 끝에 발끝만 걸치고 있었다.

    오늘은 그 자리를 벗어나 우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하는 그 등을 오래 보았다. 등은 그늘보다 우물에 더 가까이 있었다. 발걸음은 느렸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소하는 다시 젖은 흙 앞에 앉았다. 오른손 끝을 흙에 대고, 닿는 순간과 닿았다는 느낌이 오는 순간 사이를 재기 시작했다. 어제보다 그 사이가 조금 더 벌어져 있었고, 벌어진 만큼을 세려면 그 손을 또 한 번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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