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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성이 없어서 벽을 지납니다
    29화 · 2026년 9월 21일

    나르는 손

    기록관이 우물 턱에 못을 세웠다. 돌 위로 못끝이 미끄러지다가 걸리는 순간, 그 울림이 소하의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짐수레가 곁을 지나며 흙바닥을 짧게 흔들었다. 소하는 수레의 떨림과 못질의 떨림을 갈라내며 반걸음 물러섰다.

    소하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손바닥을 돌에 마저 붙였다. 새김이 번지는 결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새김은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한 획은 곧게 내려갔고 다음 획은 중간에서 꺾였다. 소하는 눈을 감은 채로도 그 결을 따라갈 수 있었다.

    기록관이 못을 거두고 서판을 펼쳤다. "오늘은 우물마다 새깁니다. 규정에는 하루 한 번이라 되어 있습니다만, 위에서 내린 명이 먼저입니다."

    관 어귀 쪽에 늙은 짐꾼이 지게를 세워 놓고 서 있었다. 소하와 눈이 마주치자 멜빵을 고쳐 멨을 뿐 다가오지는 않았다.

    소하는 일어나 손바닥에 남은 먼지를 옷자락에 문질러 털었다. 오늘 도는 순서는 어제와 같았다. 관 마당에서 가까운 쪽부터 짚어 나가 먼 쪽으로 빠지는 길이었다.

    소하는 다음 우물과 그다음 우물을 차례로 짚으며 나아갔다. 지난밤 누군가 밟고 간 발자국이 마른 흙 위에 그대로 굳어 있어 발끝에 자꾸 걸렸다.

    저잣거리를 가로지르는 동안 사람들이 소하를 피해 길을 비켜 주었다. 우물마다 멈춰 서서 무릎을 꿇는 걸음을 은포 사람들은 이미 여러 날째 보고 있었다.

    네 번째 우물 앞에서 은실 세 줄과 마주쳤다. 소매를 걷어 손목을 드러내며 지나가는 참이었다. "쉰넷을 다 도는 데 며칠이나 걸리겠습니까."

    소하는 나무틀을 옆구리에 받쳐 든 채 걸음을 멈추고 못으로 짧게 새겼다. "모릅니다. 오늘 몫부터 셉니다."

    은실 세 줄은 그 자국에 눈길을 주지 않고 소매를 도로 여몄다. "오늘 안에 다 돌지 못하면 내일은 두 배로 도십시오." 여민 소매를 한 번 쓸어내린 뒤였다. "순서를 어기지 마십시오. 하나라도 빠뜨리면 처음부터 다시 도십시오."

    다섯 번째 우물 턱에 손바닥을 붙였다. 어제 저물녘에는 오른쪽으로 짚은 것이 왼쪽에 닿아 있고 무릎이 제멋대로 꺾일 만큼 셈이 벌어져 스물여섯까지 갔는데, 기록관이 새로 그어 둔 자국을 하나씩 되짚을 때마다 그 벌어진 것이 한 칸씩 자리를 찾아 들어왔다.

    정오 무렵에는 열둘까지 내려와 있었다. 하루 만에 이만큼 걷힌 적은 없었다.

    기록관이 서판을 소하 쪽으로 기울여 보였다. "닿아 있는 자리가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소하는 그 서판을 받고도 곧바로 왼손을 폈다. 팔 안쪽을 손끝으로 눌러 오늘 온 수를 확인하는 자세였다.

    어제 저물녘에 서른일곱이던 것이, 우물 다섯을 채 돌기도 전에 서른다섯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새로 마른 우물은 하나도 없었다.

    소하는 두 셈을 나란히 놓고 다시 짚어 보았다. 자국이 늘수록 왼팔의 수는 줄었다. 우물 쪽은 그대로였다.

    관 사람들 눈에 든 것은 좋아진 쪽뿐이었다. 은실 세 줄은 서판만 한참 들여다보다가 소매를 접어 넣고 마당을 나갔다.

    기록관이 못을 다시 쥐며 서판 여백에 자국을 더 그었다. "이대로 새기면 스무날 안에 다 걷힐 겁니다."

    소하는 그 자국을 보면서도 왼팔에서 손끝을 떼지 않았다. 걷히는 쪽의 셈은 서판에 적혔고 줄어드는 쪽의 셈은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는데, 두 셈을 움직이고 있는 손은 오늘 하루 종일 하나였다.

    여섯 번째 우물을 지날 무렵 늙은 짐꾼이 다시 몸을 틀었다. 이번에는 얼굴이 정면으로 왔다. "그 손, 아직도 우물만 세고 있소."

    소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고개만 짧게 끄덕였다. 새길 말을 아직 정하지 못했다.

    일곱 번째 우물을 짚고 난 뒤, 소하는 우물에서 몇 걸음 물러나 왼손을 폈다. 새끼손가락 끝, 마디가 없는 자리에 힘을 실었다.

    눈을 감았다. 이쪽에서 좁힐 자리는 없었다. 저쪽에서 저절로 좁아지는 사이가 아직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일이었다.

    낯익은 결이 먼저 잡혔다. 오늘 아침에도 받았던 결이었다. 매듭 하나가 조여지는 모양으로 올라왔다. "오늘도 있습니다."

    소하는 그 결에 손끝을 바짝 붙이고 아무 뜻도 없는 셈 하나를 실어 보냈다. 여섯 해 동안 주고받던 방식 그대로였다.

    돌아온 것은 보낸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고쳐지지도 않았고 답이 붙지도 않았다.

    소하는 손을 거두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빈손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보낸 것이 그 모양 그대로 되왔다는 것 자체가 하나를 알려 주고 있었다. 저쪽의 그 손은 셈을 읽지 않았다. 받아서 실어 나르기만 했다.

    소하는 손끝을 뗐다가 다시 붙였다. 이번에는 낯선 결 쪽으로 뻗었다.

    여울과 소하 둘만 아는 셈에서 한 칸을 일부러 틀리게 짚어 보냈다. 여울이라면 고쳐 보낼 것이었다. 나르기만 하는 손이라면 틀린 채로 돌아올 것이었다. 변수는 그 한 칸뿐이었다.

    되돌아온 것은 틀린 채였다. 소하는 손끝을 떼지 않고 그대로 기다렸다.

    한참 뒤에 낯익은 결 쪽에서 같은 셈이 다시 올라왔다. 매듭이 조여지는 결이 못자국만큼 또렷했다. "둘째 자리를 다시 세었습니다." 매듭이 한 번 풀렸다가 다시 조여졌다. "그쪽에 누가 더 있습니까. 짚는 결이 낯섭니다."

    늦었지만 고쳐져 있었다. 여울은 아직 거기 있었다. 다만 둘 사이에 손 하나가 끼어서, 여울에게 갈 것을 먼저 받아 어딘가로 나르고 있었다.

    소하는 그 물음에 매듭 하나만 실어 보냈다. "모릅니다."

    손끝을 떼자 셈이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정오에 열둘까지 내려왔던 것이 스물넷으로 도로 벌어져, 짚고 있던 우물 턱이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한참을 더듬고서야 찾았다. 아침 내내 되짚어 돌려놓은 것이 마디 한 번에 다 나갔다.

    소하는 우물 턱을 짚어 몸을 세웠다. 더 큰 물음이 그 자리에 남았다. 그 손이 받아 나르는 것이 어디로 가는가.

    관 마당 어귀에 어머니가 서 있었다. 손에 감긴 것은 잇꽃으로 물들인 끈이었다.

    어머니가 그 끈을 소하 앞으로 내밀었다. "오른쪽 손목에 매라."

    해 질 무렵 관 마당 어귀. 낡은 나무문 옆에 선 늙은 어머니가 잇꽃으로 물들인 붉은 끈을 내밀고, 해진 삼베옷을 입은 마른 청년 소하가 손을 뻗어 그것을 받으려 하고 있다. 오른쪽 뒤로 두레박이 걸린 돌 우물이 있고, 담 너머로 은포 시장의 지붕과 차양이 낮게 이어진다.
    멀리서도 어느 우물에 서 있는지 알아보려고 가져온 것이었다.

    시장에서 소하가 우물 도는 것을 보았고, 멀리서도 어느 우물에 서 있는지 알아보려고 가져온 것이었다. 왜 도는지는 묻지 않았다.

    소하는 끈을 받아 손목에 감아 매듭을 지었다. 어머니는 그 매듭을 확인하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저녁 전에 들어와라."

    소하는 오른쪽 눈으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짙고 붉었다. 물이 고여 마른 자리는 더 짙어서, 끈 한 가닥 안에서도 진한 데와 옅은 데가 갈렸다.

    오른쪽 눈을 감고 왼쪽만 남겨 보았다. 붉은 것이 없어졌다. 붉지도 검지도 않은 잿빛 한 줄이 손목에 감겨 있었고, 진하고 옅은 갈림만 밝고 어두운 두 자리로 그대로 남았다.

    소하는 눈을 번갈아 감았다 뜨며 손목을 몇 번이고 돌려 보았다. 오른쪽을 감으면 색이 사라지고 왼쪽을 감으면 돌아왔다. 색이 한쪽 눈에서만 오게 된 지 아직 여러 날 되지 않았는데도, 소하의 고개는 이미 오른쪽을 먼저 쓰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소하는 그 끈을 소매 밑으로 밀어 넣지 않고 손목에 드러낸 채로 두었다.

    이름꾼이 관 마당 쪽에서 걸어왔다. 손에 감긴 줄자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소하는 스무 번째 우물 앞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휘청했다. 무너진 셈 탓에 디딘 발이 우물 턱 안쪽으로 미끄러졌고, 무릎이 돌 안으로 꺾여 들어갔다.

    줄자 끝이 소하 쪽으로 풀려 나왔다. 이름을 부르려는 채비였다.

    소하는 한 손으로 우물 턱을 붙든 채 다른 손으로 나무틀을 끌어당기고 못을 쥐었다. 부르지 말라는 말을 새기려면 못끝이 제자리를 찾는 것부터 기다려야 했다.

    밤사이 한 박자가 걷히고도 여덟이 남아 있었다. 여덟을 세는 동안 줄자는 다 풀렸고 못은 나무에 닿지도 못했다.

    소하는 못을 놓고 몸을 던져 이름꾼의 손목을 붙잡았다.

    팽팽하던 줄자가 그 자리에서 멎었다. 이름꾼은 붙잡힌 손목을 빼지 않았다. 잡힌 팔이 짧게 떨렸다.

    이름꾼의 다른 손이 줄자의 매듭 하나를 짚었다. "두 번 남았습니다. 아끼고 있습니다." 손끝이 그 매듭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소하는 손목을 놓고 나무틀에 새겼다. "압니다. 오늘은 아닙니다."

    이름꾼은 줄자를 손등에 도로 감으며 물러섰다. 소하가 밟았던 우물 턱 안쪽을 내려다보고서였다.

    소하는 선 채로 오늘 마른 두 자리를 손끝으로 짚어 나갔다. 우물 턱마다 남은 못자국은 소하가 짚고 간 날에만 새겨진 것이라, 자국의 깊이와 가장자리가 마른 정도로 언제 것인지 갈렸다.

    두 자리 다 처음 보는 우물이 아니었다. 어제 소하가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붙였던 우물이었다.

    소하는 기록관의 서판으로 그것을 다시 맞춰 보았다. 어제 적힌 순서와 오늘 마른 자리가 같았다. 기록관은 그 대조를 받아 적었을 뿐 아무것도 얹지 않았다.

    쉰넷을 도는 일은 세는 일이 아니라 옮기는 일이었다.

    관은 닿아 있는 자리를 한곳으로 모으려 했다. 저쪽은 그 자리를 저쪽으로 당겨 가고 있었다. 두 손이 같은 것을 붙들고 서로 반대쪽으로 끌고 있었고, 그 사이에서 소하의 손바닥이 자리를 하나씩 짚어 알려 주는 셈이었다.

    오늘 짚은 자리 가운데 몇이 내일 또 마를 것이었다. 무엇을 위해 옮기는지까지는 소하의 손에 잡히지 않았다.

    소하는 나무틀과 못주머니를 챙겨 들고 일어섰다. 아직 짚지 않은 우물이 서른 곳 넘게 남아 있었다.

    소하는 그쪽으로 가지 않았다. 걸음을 돌려 관 마당을 등지고 걸었다. 짚을수록 빠지는 것이라면 오늘 더 짚을 이유가 없었다.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왼손 없는 마디에 낯선 결이 먼저 와 닿았다. 소하가 짚기도 전에 저쪽에서 건너온 것은 처음이었다.

    소하는 걸음을 멈추고 오른쪽 손목을 들어 올렸다. 붉은 끈이 저물녘 볕 아래 늘어져 흔들렸고, 그 색이 눈에 들어와 있는 동안은 자기가 어느 쪽에 서 있는지 헷갈리지 않았다.

    결이 실어 온 것은 오늘 소하가 틀리게 보낸 그 셈이었다. 이번에는 고쳐진 채였다.

    고친 것은 여울의 손이었다. 그것을 건네 온 결은 여울의 것이 아니었다.

    소하는 없는 마디에 힘을 실은 채 그 자리에 서서, 고쳐진 셈이 어느 손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 처음부터 다시 짚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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