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속성이 없어서 벽을 지납니다
    30화 · 2026년 9월 23일

    끼어 있는 손

    은실 세 줄이 새벽 마당에 들어서며 첫 우물 팻말을 손수 뽑아 들었다. 소하는 그 팻말이 흙에서 뽑히는 진동을 발바닥으로 먼저 받았다.

    기록관이 다가와 그 팻말을 도로 꽂았다. 소하는 은실 세 줄의 입술을 놓치지 않고 좇았다. "두 배는 어제 몫입니다. 오늘은 처음부터입니다."

    어제 한참을 밟아 나아갔던 걸음이, 발밑에서 도로 처음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소하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소하는 그 팻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른손으로 우물 턱을 짚으면서도 왼손 없는 마디는 옷소매 속에 접어 넣은 채 두었다. 오늘 쓸 자리는 아직 아니었다.

    기록관이 옆에 서서 오늘 도는 순서를 나무틀 귀퉁이에 다시 못으로 새겼다. 어제와 같은 우물 전부, 다만 첫 자리부터였다. "처음부터면 저물녘 안에 다 못 돕니다." 못끝을 떼며 그렇게 덧붙였다.

    두 배로 돌라던 명은 오늘 처음부터 다시 도는 벌로 갈음됐다. 두 벌을 겹쳐 받지는 않았다.

    짐꾼 하나가 지게를 세워 놓고 그 광경을 멀찍이 보고 있었다.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몸을 완전히 돌리지도 않았다.

    짐꾼의 입술이 움직였다. "오늘도 처음부터인가 보오." 소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길 말은 아니었다.

    담 너머에서 소금에 절인 냄새가 낮게 넘어왔다. 짐수레도 아직 나오지 않은 시각이었다.

    소하는 곧바로 왼손을 폈다. 팔 안쪽을 손끝으로 눌러 오늘 온 수를 확인했다. 어제 서른다섯으로 내려앉았던 것이, 손끝이 닿기도 전에 서른셋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소하는 그 사이를 되짚어 보았다. 늘 있던 차례라면 우물이 먼저 마르고 셈은 그 뒤를 따랐다. 오늘 셈은 그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줄어 있었다 — 적어도 지금까지는, 새로 마른 우물이 있다는 말이 못자국으로도 실매듭으로도 오지 않았다.

    소하는 그 자리에서 오늘 온 수를 두 번, 세 번 다시 짚었다. 자국은 흔들리지 않았다.

    기록관이 그 수를 받아 못으로 새기며 서판에 옮겼다. 오늘 몫을 적어 넣었을 뿐, 다른 말은 보태지 않았다.

    확인할 길은 하나였다. 오늘 새로 마른 우물이 정말 하나도 없는지, 발로 다시 도는 수밖에 없었다.

    소하는 오전 내내 우물을 처음 자리부터 다시 짚으며 걸었다. 어제 이미 확인해 둔 자리를 다시 무릎 꿇고 짚어야 했다.

    걸음을 옮기며 소하는 그 앞섬을 곱씹었다. 셈이 먼저 줄었다면 우물이 마르기 전에 이미 무언가 빠져나간 자리가 있을 것이었다. 물이 있는지 없는지보다, 짚었을 때 좁아지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면 될 일이었다.

    소하는 그때부터 우물마다 물을 확인하는 대신 오른손으로 턱을 짚어 좁아지는 느낌부터 먼저 살폈다. 한참을 그렇게 짚어 나가도 전부 그대로 있었다.

    무릎이 쓸린 자리마다 마른 흙이 눌어붙었다. 짚고 일어나고 걷는 동작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는지 소하 자신도 세지 않았다.

    손바닥도 성치 않았다. 어제까지 짚은 자리에 잡혔던 굳은살 위로 오늘 자리가 겹쳐 쓸리며 붉게 부풀었다.

    돌 틈에 짙게 이끼가 낀 우물 앞에서 손끝이 이상했다. 물은 그득한데 짚어도 좁아지는 것이 없었다. 잠깐 사이를 두고 다시 짚어도 마찬가지였다.

    소하는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다른 우물과 똑같이 젖어 있는 돌인데 이 우물만 짚는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바로 이웃한 우물에서도 비슷하게 옅은 느낌이 왔다. 소하는 처음엔 이 우물도 같은 것이라 여기고 우물 턱에 표를 새겼다. 기록관이 다가와 그 표 옆에 못을 박아 서판과 맞춰 두었다.

    손을 떼지 않고 좀 더 오래 대고 있자 아주 가늘게 좁아지는 것이 뒤늦게 잡혔다. 옆 우물은 없어진 자리가 아니었다. 유난히 깊어 신호가 얕게 오는 것뿐이었다.

    소하는 방금 새긴 표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그 옆에 한 번 더 표를 새겨 먼저 새긴 것을 지웠다. 얕은 것과 없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하마터면 멀쩡한 우물 하나를 없어진 자리로 잘못 새길 뻔했다.

    기록관이 두 표를 나란히 서판에 옮겨 적었다. "먼저 새긴 것과 고친 것, 둘 다 남습니다."

    다시 이끼 낀 우물로 돌아가 짚었다. 아무리 오래 대고 있어도 그 자리는 끝까지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이번에는 틀리지 않았다.

    소하는 그 우물 턱 돌 색이 유난히 짙다는 것을 눈으로도 확인해 두었다. 손으로 잡히지 않는 것을 눈으로라도 붙들어 두고 싶었다.

    소하는 오전 내내 짚은 자리를 되짚어 보았다. 우물은 어제와 똑같이 물을 안고 있었고 마를 낌새가 잡히는 자리조차 없었다. 그런데 셈은 아침에 벌써 둘을 내준 뒤였다. 늘 뒤를 따라오던 것이 오늘은 앞서 와 있었다.

    기록관은 그 확인을 받아 적었을 뿐, 자신의 말은 보태지 않았다.

    소하는 이끼 낀 우물 턱에 표를 남기지 않고 대신 소매 속 마디를 폈다. 오늘 짚은 것이 정말 없어진 것인지 저쪽에서 마저 확인해 볼 참이었다.

    눈을 감고 마디 끝을 세웠다. 낯익은 결이 먼저 잡혔다. 오늘도 있었다.

    소하는 그 결에 손끝을 붙이고 오늘 짚은 것 하나를 실어 보냈다. 물은 있는데 아무것도 안 잡히더라는 그 우물의 셈이었다.

    돌아온 것은 실어 보낸 그대로였다. 이번에는 고칠 것이 없었다.

    소하는 손끝을 떼지 않고 기다렸다. 버티는 사이가 길어질수록, 둘 사이 어딘가에 손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 뚜렷해졌다.

    한참 만에 매듭이 가볍게 한 번 움직였다. 여울 쪽에서 온 것은 셈이 아니었다. 그 우물의 자리를 가리키는 표식 하나가, 소하가 보내기도 전에 이미 와 있었다는 것만 실려 왔다.

    소하는 그 표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곧바로 알 수 없었다. 셈이 오가기도 전에 자리를 먼저 알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흐려짐이 손을 떼기도 전에 따라왔다. 스물넷이던 것이 손끝을 놓는 사이 서른 가까이 벌어져, 짚고 있던 우물 턱이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다시 더듬어야 했다.

    소하는 그 자리에 잠시 웅크려 앉은 채 숨을 골랐다. 벌어진 것을 되짚어 돌려놓기 전에는 다음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정오 무렵 소하는 물통을 채우러 저잣거리 어귀까지 나갔다. 담이 낮아지는 자리에서 무명이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몇 편을 걸러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옷깃은 여전히 왼쪽으로 여며 있었고, 시장 쪽에서 넘어오는 볕에 그늘진 반쪽 얼굴만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무명이 담에서 몸을 떼고 반 걸음 나와 얼굴을 볕 쪽으로 돌렸다. 그늘에 있던 반쪽까지 볕에 드러나서야 입술이 제대로 보였다.

    소하를 보고도 다가오지 않고 손끝으로 허공에 짧은 선을 그었다. 그에게는 늘 그렇게 거리부터 재는 버릇이 있었다.

    "그쪽 것들, 요 며칠 부쩍 바빠졌소." 무명이 다시 손끝으로 선을 그었다. "우리는 그걸 자리를 세운다고 하오. 옮긴다는 말은 안 쓰오."

    소하는 나무틀에 새겼다. "어디에 세웁니까." 무명은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지는 나도 모르오. 세우는 것과 어디로 가는지는 다른 사람의 일이오."

    소하는 그 자리에 이어 오전에 짚어 둔 것을 꺼내 새겼다. "자리를 세우면 그 자리에 무엇이 남습니까."

    무명은 손끝으로 다시 선을 그었다. "그쪽엔 남는 게 없소. 남는 쪽은 여기요."

    소하는 그 말을 오래 짚었다. 남는 것이 이쪽에 있다면, 손끝 말고 다른 것으로도 잡힐 수 있을지 몰랐다. 관은 자리를 한곳으로 모으고 저쪽은 자리를 세운다 — 같은 것을 두고 부르는 말이 서로 달랐다. 소하는 오늘 남은 우물마다 손바닥을 좀 더 오래 대 보기로 했다.

    무명은 옷깃을 한 번 여미고 몸을 돌려 시장 쪽으로 걸어갔다.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의 걸음은 여전히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한낮 은포 저잣거리 어귀. 낮은 돌담에서 반 걸음 나온 마른 사내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 채 얼굴을 볕 쪽으로 돌리고 손끝을 들어 허공에 짧은 선을 긋고 있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해진 삼베옷을 입은 소하가 나무틀을 옆구리에 끼고 못을 쥔 채 그 입술과 손짓을 보고 있다. 뒤로 차양과 지붕이 낮게 이어지고 장 보는 사람들이 흐릿하게 지나간다.
    그쪽엔 남는 게 없소. 남는 쪽은 여기요.

    소하는 그 뒷모습이 지붕 그늘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물통을 채워 들었다.

    물통이 무거워질수록 걸음은 느려졌지만, 소하는 오늘 안에 마저 돌아야 할 우물 쪽으로 곧장 몸을 돌렸다.

    오후, 소하는 관 마당으로 돌아와 은실 세 줄과 마주쳤다. 소매의 은실 세 줄이 낮볕에 옅게 빛났다.

    소하는 나무틀을 세우고 못을 쥐었다. 오늘 처음부터 다시 도는 이유를 묻는 대신, 더 오래 미뤄 온 것을 새기기로 했다. "왜 우물 전부를 다시 잽니까."

    은실 세 줄이 소매를 걷다 말고 손을 멈췄다. 소매를 마저 걷은 뒤에야 다시 움직였다. "쉰넷을 처음 센 것은 관이 아닙니다." 여민 소매를 한 번 쓸어내린 뒤였다. "이백 년 전에 다 센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남긴 수는 쉰넷이 아닙니다. 하나가 더 많습니다."

    소하는 그 말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하나가 더 많았다면, 그 하나는 지금 없다는 뜻이었다. 못끝을 나무에 대려는데, 밤사이 한 박자 걷히고도 일곱이 남은 손이 늦게 움직였다.

    일곱을 세는 사이 은실 세 줄은 이미 몸을 돌린 뒤였다. 없어진 하나는 어디입니까 — 새기려던 물음은 못이 나무에 닿기도 전에 놓쳤다. 소매 자락만 마당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소하는 반쯤 새기다 만 자국 앞에 남았다. 다음 물음을 붙잡을 손이 오늘은 늦었다.

    기록관이 그 반쪽짜리 자국을 서판에 그대로 옮겨 적었다. 지우지 않고 남겨 두는 것이 기록관의 방식이었다.

    소하는 남은 우물을 마저 돌았다. 처음부터 다시 도는 통에 이미 확인한 자리들을 되짚느라 한나절이 그대로 갔고, 저물 무렵에야 이끼 낀 우물 앞에 이르렀다. 턱 위에 올린 손바닥에 낯선 온기가 잡혔다.

    다른 우물들은 하루 종일 그늘에 있던 돌답게 차게 식어 있었는데 이 우물만 손바닥 아래가 미지근했다. 방금까지 무언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던 것 같았다.

    소하는 그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 손바닥을 오래 붙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아침에 받아 둔 서른셋의 자리가 손끝에서 흐려졌다.

    손을 떼고서야 그 값이 빠져나간 것을 알았다. 소하는 기록관의 못자국을 처음부터 되짚어 오늘 셈, 서른셋을 다시 찾아냈다.

    소하는 두레박줄을 당겨 보았다. 걸리는 무게가 없었다. 줄 끝에 닿아야 할 물이 없었다.

    아침에 그득했던 자리가 저물녘에는 말라 있었다. 오늘 아침 순서를 뒤집어 놓았던 셈이, 이 우물 앞에서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여느 날의 걸음이었다면 이 우물이 마르는 순간에 닿았을 것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도는 벌이 반나절을 삼킨 자리에서, 관이 세려던 셈 하나가 그렇게 손에서 빠져나갔다.

    기록관이 다가와 마른 턱을 손끝으로 확인하고 못을 들었다. "오늘 우물 가운데 처음으로 마른 자리입니다." 서판 위에 시각까지 함께 적었다.

    소하는 새기지 않고 손끝으로 두 자국을 번갈아 짚었다. 하나는 오늘 아침 셈이 먼저 줄었던 자리에 남긴 자국이었고, 다른 하나는 방금 기록관이 새긴 자국이었다.

    기록관의 손이 잠깐 멈췄다. 두 자국을 나란히 놓고 보다가 아무 말 없이 그 옆에 작은 금 하나를 더 그었다. 먼저 온 것과 나중에 온 것을 갈라 두는 표시였다.

    소하는 그 표시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셈이 오간 것이 아니었다. 우물이 서 있던 자리, 그 자체가 저쪽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관이 모으려는 것도 저쪽이 당겨 가는 것도 숫자가 아니라 그 자리였다.

    소하는 그 자국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손을 안 댄 우물이 마흔 곳 가까이 남아 있었고, 그중 몇이 이끼 낀 우물과 같은 온기를 품고 있을지는 아직 몰랐다.

    소하는 나무틀과 못주머니를 고쳐 쥐고 다음 우물 쪽으로 곧장 걸음을 옮겼다. 오늘 안에 그 온기부터 남김없이 찾아야 했다.

    몇 걸음 못 가 손바닥이 다음 우물 턱을 스쳤다. 아직 오늘 순서로는 짚지 않은 자리였다.

    손을 마저 얹자 돌은 이미 미지근했다. 소하는 나무틀을 흙에 내려놓고 두 손으로 그 턱을 감싸 쥐었다. 돌이 식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부터 세어 둘 참이었다.

    0

    댓글 0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구글로 로그인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줄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