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친 획
나무틀 귀퉁이에는 어제 기록관이 새긴 글귀가 밤을 넘기고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소하는 눈을 뜨자마자 손톱 끝으로 그 자국을 훑어 읽었다. "오늘부터는 젖은 손을 먼저 확인한다."
획마다 깊이가 고르게 파여 어둠 속에서도 글자가 낱낱이 갈렸다. 그 곧은 결이 오늘따라 남의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나무틀을 어깨에 걸고 못주머니를 반대쪽 허리에 채우자 몸이 왼쪽으로 기울었다. 하루를 돌다 보면 그 쏠림이 걸음마다 쌓여 발바닥 안쪽부터 닳았다.
마당 한가운데에서 기록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하가 다가서자 말없이 왼손을 잡아 손등과 손톱 밑, 소맷단 안쪽을 차례로 살폈다.
젖은 자리가 남았는지 보는 것이었다. 어제 정해진 규정이 하루 만에 소하의 손목 위에서 처음 쓰이고 있었다.
손을 놓아 주자 소하는 왼팔 안쪽으로 오는 줄어드는 수를 짚었다. 위쪽에서 서른하나, 아래쪽에서도 서른하나가 잡혔다. 어제 여울이 값을 치르고 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손으로도 나무틀 모서리를 눌러 보았다. 열둘을 세고서야 닿음이 올라왔다. 못을 쥐기에는 모자람이 없었지만 나뭇결이 늦게 왔다.
담 앞에는 삽 자루들이 기대어 서 있었다. 해가 마당 끝까지 닿으면 인부들이 그 자루를 잡고 나설 것이었다.
은실 세 줄이 소매를 여미며 다가섰다. 소하는 그 입 모양을 놓치지 않고 좇았다. "오늘 메울 자리는 손으로 정합니다. 어제처럼 거두시겠습니까."
소하는 대답 대신 나무틀을 땅에 세웠다. 어제 거둔 손은 아무것도 막지 못했고 문 안쪽에 남은 사람은 그대로였다.
쥐고 있어서는 그 문에 닿을 길이 없었다. 소하는 못을 쥐고 첫 줄을 새겼다. "손은 내드리겠습니다."
획을 하나씩 누르고 떼는 사이 글자가 나무 위에 또렷이 앉았다. 은실 세 줄은 홈이 파이는 자리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둘째 줄로 넘어가자 못끝이 멈췄다. 메의 첫 획만 파인 채였다. 손등의 힘줄이 오래 섰다가 가라앉는 동안 못끝은 결 위에 머물렀다.
이미 파인 획은 지워지지 않았다. 소하는 그 획을 글자의 머리로 삼아 뒤를 이었다. "메울 자리는 제가 고른 자리만입니다. 문 안쪽 우물은 빼 주십시오."
은실 세 줄은 나무틀을 위에서 아래로 읽어 내렸다. 소하의 눈이 그 입가를 따라갔다. "고른 자리부터 보겠습니다. 해가 기울기 전에 정해 주십시오."
받아들인다는 말도 물리친다는 말도 아니었다. 소하는 새긴 글자를 손가락으로 더듬었고 흘려 새긴 획은 하나도 없었다.
한낮이 되도록 소하는 우물 턱마다 눈을 감고 무릎을 꿇어 오른손을 얹었다. 짚을 때마다 결이 손목으로 올라왔다.
결이 지나간 자리마다 손끝이 한 겹씩 두꺼워졌다. 소하는 그것을 세지 않으려 애썼다.
우물마다 곁에 매인 두레박 줄도 당겨 무게를 재어 두었다. 물이 그득한 우물은 줄 끝이 손바닥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해가 머리 위에 오르자 소하는 왼팔 안쪽을 다시 짚었다. 위쪽에서는 서른이, 아래쪽에서는 서른하나가 잡혔다.
아침에 나란하던 두 값 가운데 위쪽만 내려와 있었다. 어제 흙더미 위에서는 위쪽이 아래쪽보다 컸는데 지금은 반대였다.
어느 우물이 그런지는 팔이 일러 주지 않았다. 소하는 흙더미에서 먼 우물부터 같은 짚음을 되풀이했고, 담 앞과 마당 가운데 우물에서는 두 값이 나란히 맞아 들어갔다.
소하는 걸음을 옮겨 흙더미 바로 옆 우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바닥이 돌에 닿자마자 위쪽 값이 서른 밑으로 꺼졌다.
아래쪽은 제자리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두레박 줄을 당기자 아무것도 실리지 않은 두레박이 벽을 스치며 딸려 올라왔다. 어긋나는 자리는 흙더미에 가까울수록 짙었다.
다음에 바꿀 것은 물이었다. 물이 모자라 위쪽이 꺼진 것이라면 채웠을 때 값이 돌아와야 했다.
마침 늙은 짐꾼이 물지게를 지고 마당 어귀로 들어섰다. 오른쪽 어깨는 멜대 자국으로 반들거렸다.
양쪽 동이의 물이 걸음마다 엎치락뒤치락해서 그 무게가 마당 흙을 타고 소하의 발바닥까지 고르지 않게 올라왔다.
소하가 나무틀에 새겨 내밀자 짐꾼이 걸음을 멈췄다. "물 두 동이를 이 우물에 부어 주십시오." 짐꾼은 입 모양으로 글자를 따라 읽고 지게를 내려놓았다.
동이는 소하가 나눠 기울이기에도 무거웠다. 두 번에 나눠 붓는 동안 팔이 물의 무게를 따라 아래로 쏠렸고, 쏟아진 물은 우물 안으로 꺼졌다.
소하는 두레박 줄을 손목에 감고 무게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줄 끝은 조금도 무거워지지 않았다.
남은 동이까지 다 비웠어도 물은 고이지 않고 어딘가로 꺼졌다. 위쪽 값은 서른에서 올라오지 않았고 아래쪽은 서른하나 그대로였다.
짐꾼은 멜대에 손을 얹은 채 부엌 물을 축낸다고 입을 비죽였다. 소하는 벌어진 입 모양을 따라 읽었다. "그 물은 부엌 몫이오."
끊긴 것은 물이 드나드는 길이었고 이쪽에 서 있는 자리는 그 우물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물은 이미 끊겼는데 자리는 아직 남은 우물이 마당 한쪽에 생겨 있었다. 삽이 한 번도 닿지 않은 우물이었다.
메운 자리가 이웃의 물길까지 눌러 끊었다고 손은 읽고 있었다. 어제 메운 흙이 하루 사이에 옆 우물의 물을 가져간 셈이었다.
짐꾼이 부엌 쪽으로 멀어지는 동안 소하는 흙더미 바로 옆 우물 턱에 작은 돌 하나를 얹어 표를 남겼다.
문 안쪽을 빼 달라고 새겨 놓고도 그 안이 아직 그 안인지 알지 못했다. 삽이 갈 자리를 정하기 전에 여울의 결부터 다시 잡아야 했다.
소하는 어제 메워진 흙더미 가장자리로 갔다. 다져지지 않은 겉면은 낮볕에 말라 갈라졌고, 가장자리 흙은 발끝이 닿을 때마다 조금씩 아래로 흘러내렸다.
소하는 무너지는 가장자리를 등지고 눈을 감았다. 왼손 새끼손가락의 없는 마디를 뒤로 돌려 흙 쪽으로 겨눴다. 흙이 흘러내리는 속도는 소하가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이 걸렸다. 그러나 여울과 나누던 매듭의 간격은 아니었다. 한 방향으로만 미끄러지는 결이었고, 어제 소하를 끌고 가려던 그 손의 결이었다.
소하는 그 결에 말을 실어 보냈다. "오늘 손은 더뎌졌습니다." 되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보낸 말은 그대로 받아 날라져 어디에도 닿지 않고 없어졌다.
여울에게 가는 길목에 나르는 손이 앉아 있었다.
어제 여울이 그 손의 딛을 자리를 밀어 올려 없앤 뒤로 낯익은 결이 잡히지 않는 까닭을, 소하의 손은 이렇게 읽고 있었다. 여울이 자리를 내주고 그 손 아래로 내려갔다고.
소하는 마디를 세운 채 오래 기다렸다. 걸리는 것은 미끄러지는 결뿐이었고 여울의 결은 끝까지 잡히지 않았다.
몸을 돌리려는 순간 발밑의 가장자리가 무너졌다. 소하는 흙과 함께 미끄러져 마른 흙 위로 얼굴을 찧었다.
광대뼈 밑 살이 찢어졌다. 피는 곧 멎었으나 살이 붙지 않고 벌어진 채 마르기 시작했다.
마당에는 삽 자루를 쥔 인부들이 우물 사이에 서 있었다. 해는 담 끝에 걸려 있었고 은실 세 줄은 기록관이 받쳐 든 서판을 넘겨다보고 있었다.
소하가 다가서자 은실 세 줄의 입가가 짧게 오르내렸다. 소하는 그것을 끝까지 따라 읽었다.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기록관이 표시한 자리부터 메웁니다."
서판에는 물이 그득한 우물 셋이 나란히 표시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에는 소하가 흙더미에서 보낸 시간만큼 벌써 흙이 차오르고 있었다.
소하는 나무틀을 무릎에 걸치고 못을 쥐었다. 흙이 들어가고 있는 우물을 빼면 물이 그득한 우물은 둘뿐이었다. 오른손이 아직 쓸 만한지는 새기면서 알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이든 저쪽으로 실려 가는 자리는 하나였다. 그렇다면 물이 그득한 둘보다 이미 물이 끊긴 하나를 내주는 쪽이 값이 쌌다.
소하는 못끝을 서둘러 눌렀다. 처음 여섯 글자는 갈라져 앉았다. "물이 끊긴 우물은…" 앞 획의 감각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틈이 없어 못은 쉬지 않았다.
일곱째 글자부터 획이 서로를 밟았다. 앞 획의 감각이 돌아오기도 전에 다음 획이 그 위로 눌려, 겹친 홈은 글자마다 검은 뭉치가 되어 갔다.
소하는 못을 떼고 열다섯을 세고서야 닿음이 올라왔다. 한 박자만 앞이었어도 갈렸을 획이었다.
여섯 글자는 읽혔고 그 뒤로는 밟혔다. 이 손이 서두름을 견디는 문턱은 방금 그 자리에 있었다.
은실 세 줄이 검은 자국을 손끝으로 쓸었다. 입가에서 읽어 낸 말은 이러했다. "읽히지 않습니다."
은실 세 줄이 눈짓하자 기록관이 소하의 왼손부터 다시 잡아 살폈다. 오늘 하루 그 손은 흙탕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
손을 놓던 기록관의 눈이 소하의 광대뼈 밑에서 멈췄다. 벌어진 채 마른 상처였다. 기록관은 서판에 그 자리를 옮겨 적고서야 몸을 돌렸다.
나무틀 앞면에는 빈 자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지워지지 않는 홈이 아침의 두 줄과 방금의 뭉치로 반 넘게 차 있었다.
소하는 나무틀을 뒤집어 아직 매끈한 뒷면을 위로 했다. 이번에는 못끝을 대기 전에 앞 획의 감각이 손끝에 차오르기를 기다렸다.
한 획을 새기고 나면 또 기다렸다. 그림자가 마당을 가로질러 눕는 동안 나무 위 글자는 한 자씩 느리게 늘어 갔다.
못이 점점 무거워졌다. 처음에는 손끝에 실리던 무게가 손바닥으로 내려앉고 손목으로 번지더니, 쥐고 있는 일 자체가 짐이 되었다.
부엌에서 빈 동이를 챙겨 나오던 짐꾼이 걸음을 멈췄다. 소하의 오른손이 획 하나에 한참 걸리는 것을 멜대에 기대어 지켜보다가 나무틀 아래쪽을 무릎으로 받쳐 주었다.
"내일도 삽은 있소. 손부터 쉬시오." 짐꾼의 입 모양이 획과 획 사이마다 이어졌다. 소하는 고개를 젓는 대신 다음 획에 못끝을 댔다.
"흙더미 바로 옆 우물입니다. 물이 끊겼습니다." 소하가 새긴 글자가 한 자씩 얕은 그늘을 담고 나무 위에 놓였다.
마지막 줄을 새기려는 참에 못끝이 다시 나무 위에서 멈췄다. 남은 자리는 한 줄이 들어갈 만큼이었다. 못끝이 획 하나를 긋는 시늉으로 내려가다가 오른손이 먼저 힘을 뺐다. 마당 저편에서 삽날이 번쩍이는 동안 못끝은 아무 획도 남기지 않고 나무에서 멀어졌다.
마지막 글자가 앉았을 때 마당에는 그림자가 다 누웠고 인부들의 삽날만 희게 남아 있었다. 소하의 오른손은 손가락이 펴지지 않았다.

은실 세 줄이 나무틀을 넘겨받아 뒷면을 끝까지 읽었다. 앞면으로 돌려 아침의 마지막 줄에서 손끝을 멈췄다.
문 안쪽 우물을 빼 달라는 줄이었다. 손끝은 그 줄에 오래 머물렀으나 은실 세 줄은 아무것도 답하지 않았다.
은실 세 줄이 고개를 돌려 인부들에게 눈짓했다. 인부들은 서판에 표시된 남은 둘을 지나쳐 소하가 새긴 우물 쪽으로 몸을 돌렸다.
흙더미 바로 옆 우물 턱에는 낮에 얹어 둔 작은 돌이 아직 있었다. 인부 하나가 그 돌을 집어 담 밖으로 던졌다.
삽날이 우물 안으로 처음 흙을 퍼 넣었다. 왼팔 안쪽에서 아래쪽 값이 서른으로 내려앉아 위쪽과 맞아떨어졌다.
그 우물에 서 있던 자리가 이쪽을 떠나 저쪽에 얹힌 값이었다. 짐꾼이 나무틀과 못주머니를 풀어 제 멜대에 걸었고 소하는 막지 않았다.
소하의 두 손은 나무틀에서도 못주머니에서도 떨어져 있었다. 담 밖으로 던져진 돌이 마른 흙 위를 구르다 멎었다.
삽날은 쉬지 않고 흙을 퍼 넣었다. 우물 어귀에서 일어난 흙먼지가 삽 자루를 쥔 인부들의 발목을 낮게 덮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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