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과 넷
부엌 문틈으로 솥뚜껑 밑의 김이 새어 나왔고, 어머니는 그 앞에서 쌀바가지를 물에 담가 손바닥으로 휘젓고 있었다. 손바닥마다 붉은 끈 결이 가로로 남아 있었고, 물에 잠긴 동안 그 자리만 허옇게 불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내려다보지 않고 뿌연 물을 버렸다.
소하는 문지방 밖에서 그 손을 눈으로 좇았다. 자국은 손목 밑에서 손가락 뿌리까지 고르게 누워 있었고, 쌀알이 스칠 때마다 붉은 기가 잠깐 짙어졌다.
소하는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골이 아물지 않은 채 마르고 있었고, 벗겨진 손끝은 옷깃에만 스쳐도 쓰라렸다.
어머니가 고개를 돌렸다. 입술이 짧게 읽혔다. "밥 먹어라." 소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어머니는 수저 놓을 자리를 턱으로 가리키고 도로 솥 쪽으로 돌아섰다.
소하는 그릇을 왼손으로 받쳤다. 오른손이 숟가락 끝에서 자꾸 기울어 밥알이 무릎 위로 떨어졌고, 어머니는 그것을 줍지도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릇을 비우고 일어서니 뒷문 너머로 소하네 우물 턱이 보였다. 낮은 돌담이 그 턱을 관 마당 쪽 담 앞 우물과 갈라놓고 있었다. 어제 저녁 돌에 새겨지지 못한 한 줄이 가리킨 자리가 그 담 이쪽이었다.
소하는 문간에서 나무틀을 어깨에 걸고 못주머니를 허리에 찼다. 관 마당 담을 따라 걷는 동안 허리춤에 감은 붉은 끈이 걸음마다 옆구리를 눌렀다.
관 마당에는 담 그림자가 우물 턱을 다 덮고 있었다. 해가 낮아 그림자는 마당 끝까지 길게 누웠고, 소하는 그 끝이 얼마나 물러가는지로 아침의 길이를 쟀다.
인부들이 담 앞에 나란히 서서 삽 자루 끝을 땅에 세우고 기다렸다. 그 곁에서 기록관이 어제 새긴 홈을 손끝으로 훑어 내렸다.
인부 한 사람이 소하의 광대뼈 밑 마른 상처를 곁눈질하다가 얼른 삽 자루로 고개를 돌렸다. 삽날이 볕을 받아 희게 번쩍였다.
소하는 손을 대기 전에 왼팔 안쪽부터 짚었다. 위쪽도 아래쪽도 서른이었다. 이어 오른손 엄지로 돌 모서리를 눌러 열일곱을 세고서야 닿음이 올라왔다.
기록관의 입 모양이 끊어 읽혔다. "오늘 메울 곳은 셋입니다. 물이 끊긴 우물부터, 그다음은 쓰는 이 없는 우물 둘입니다. 어제 새긴 차례 그대로입니다." 소하는 그 입가를 끝까지 좇아 받았다.
삽이 담 앞 우물로 들어갔다. 삽날이 안쪽 벽을 긁는 떨림이 돌 턱을 타고 손목 힘줄까지 올라왔고, 소하는 눈을 감은 채 자리가 저쪽으로 딸려 가는 때를 기다렸다.
해가 마당 한가운데로 올라왔다. 삽은 담 앞 우물을 메운 뒤 두레박이 걸린 지 오래인 우물들로 차례로 옮겨 갔고, 소하는 삽이 떠난 자리마다 따라가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얹었다.
흙이 들어간 우물은 셋이었다. 눈으로 본 것도 셋이고 돌 턱에 새겨진 홈도 셋이었다. 그러나 소하가 세러 나선 수는 처음부터 셋이 아니었다.
어제 빈 손끝으로 돌을 긁다 만 그 한 줄이 맞으면 오늘 끊기는 자리는 넷이어야 했다. 소하는 손을 얹을 때마다 셈이 셋에서 멎기를 바랐다. 맞기를 바란 적이 없는 셈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셈은 셋에서 멎지 않았다. 담 앞 우물에서 돌담 쪽으로 손을 옮기자 끊긴 결이 하나 더 걸렸다. 소하는 같은 턱을 다시 짚었고 수는 그대로 넷이었다.
어긋난 자리는 삽 자루가 서 있지 않은 쪽, 담 너머에서 왔다. 소하는 벗겨진 손끝이 돌 모서리에 쓸리는 쓰라림을 참고 끊긴 결의 끝을 담 쪽으로 따라갔다.
소하는 돌담을 넘어 뒷마당으로 갔다. 이끼 낀 부엌 우물 턱 위에 두레박 줄이 사려져 있었다. 끊기는 때를 잡아야 어디서 어떻게 이어졌는지 길이 보일 것이었다.
소하는 무릎을 꿇고 돌 턱에 오른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담 저편에서 흙이 쏟아질 때마다 떨림이 돌담을 타고 넘어왔고, 소하는 손가락 끝을 돌 위에 곧게 세웠다.
떨림이 왔다. 그러나 오른손이 스물을 세고서야 닿음이 올라왔을 때 돌은 이미 끊긴 뒤의 돌이었다.
소하는 손바닥 전체를 돌에 눌러 닿음을 앞당겨 보려 했다. 다음 떨림도 그다음 떨림도 손이 알아챘을 때는 가라앉은 뒤였다.
늦어진 만큼 끊김은 늘 앞서 가 있었다. 벗겨진 손끝에서 피가 배어 이끼 위에 붉게 번졌다.
뒷문이 열리고 어머니가 물동이를 옆구리에 끼고 나왔다. 소하가 일어나 길을 내자 어머니는 우물 턱에 동이를 내려놓았다.
어머니는 줄을 풀어 두레박을 내렸다. 줄이 턱 위를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소하는 눈으로 좇았고, 줄 끝이 끌리지 않는 자리에서 어머니의 손이 멈췄다가 천천히 당기기 시작했다.
두레박이 올라왔다. 마른 나무 테가 돌 턱에 걸렸는데 바닥에는 물이 손가락 한 마디쯤 깔려 있을 뿐이었다. 어제 이맘때는 테 아래 손가락 두 뼘까지 차서 올라왔다.
어머니는 그 바닥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았다. 우물 안 어둠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줄을 다시 잡았다. 손바닥이 거친 올 위로 눌렸다.
아침에 본 붉은 자국이 올 사이에 다시 패이면서 손바닥 가운데가 하얗게 질렸다. 어머니는 줄을 놓고 두 손바닥을 펴 보았다. 오래 보지는 않았다. 소매를 끌어 내려 손목까지 덮고 도로 줄을 잡았다.
소하의 눈은 그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묻지 않았다. 두레박을 다시 내리고는 소하의 발치를 턱으로 가리켰다. 입 모양이 짧게 끊겼다. "거기 앉아라."
소하는 어머니가 가리킨 돌 위에 앉아 우물 턱에 오른 손바닥을 폈다. 담 저편에서는 아직 삽이 흙을 퍼 올리고 있었다.
눈을 감자 흙이 쏟아지는 박자마다 돌담이 떨었다. 떨림이 돌 턱으로 건너와 손바닥을 밑에서 밀어 올렸다가 도로 놓았고, 밀려 올라간 만큼 손바닥과 돌 사이가 좁아졌다. 얼마나 좁아질지는 담 저편의 삽이 정했다.
몇 박자가 지나 결이 걸렸다. 이번에는 때를 쫓지 않고 자리를 짚었다. 돌 밑 깊은 곳의 끊긴 물길이 손바닥 밑으로 윤곽을 드러냈고, 담 앞 우물에서 돌담을 건너온 자리와 같았다.
왼팔 안쪽의 아래쪽 값은 움직이지 않았다. 물은 끊기고 이쪽에 선 자리만 남은 우물이었다. 삽이 닿은 적 없는 이 턱 밑이 넷째였다.
손을 떼자 오른손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한참을 펴지지 않았다. 짚어 본 값이 그 자리에서 손으로 왔다. 소하는 왼손으로 오른 손등을 두드리고 손바닥을 펴 우물 쪽으로 밀어 보였다. 여기라는 뜻이었다.
어머니는 대꾸 없이 두레박을 턱 위에 걸쳐 놓고 동이를 옆구리에 끼었다. 동이 안에서 물이 밑바닥만 덮고 흔들렸다. 입술이 또박또박 읽혔다. "들어와 앉아라."
오후가 기울었다. 관 마당 담 밑 그늘에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 사람이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무명이었다. 나흘 만이었다.
무명이 손짓으로 앉으라 했다. 소하가 곁에 돌을 끌어다 앉자 무명의 눈이 소하의 벗겨진 손끝에 닿았다. 입 모양이 천천히 풀렸다. "우리 쪽에는 매듭계가 없어 상처에 잎을 씹어 얹소. 그대 손에는 잎을 얹어도 덮이지 않겠소."
소하는 오른손가락 넷을 펴 보이고 주먹을 돌담 쪽으로 눌러 내렸다. 오늘 끊긴 것은 넷이라는 뜻이었다. 무명은 그 손가락을 눈으로 세었다.
무명의 입 모양은 바뀌지 않았다. "내 눈에 닿는 곳은 셋뿐이오. 넷째는 나도 못 짚겠소." 소하는 입가를 놓치지 않고 읽었다.
무명은 소하의 손가락 넷과 담 너머를 번갈아 보았다. 무릎에 얹은 제 손으로 허공을 두 번 짚어 보다가 그만두었다. 그쪽 셈으로도 넷째가 안 잡히는 얼굴이었다.
소하는 끈에 매듭 둘을 지어 내밀었다. 못 짚는 것과 못 보내는 것이 같은 것이냐고 물을 자리였는데 매듭 둘이 낼 수 있는 뜻은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무명은 그 매듭을 오래 더듬었다.
무명은 무릎을 펴고 일어나 옷깃을 왼쪽으로 다시 여몄다. "셋이라고 해 두겠소. 그대 눈에 넷이면 넷이오." 소하는 그 입 모양을 끝까지 좇았고, 무명은 담 밑 그늘을 따라 마당 어귀로 멀어졌다.
기록관은 돌 턱 앞에서 오늘의 홈을 새길 자리를 고르고 있었다. 삽이 들어간 우물들은 이미 돌 위에 나란히 파여 있었고, 소하는 그 아래 남은 맨돌을 오래 보았다.
소하는 허리춤의 끈을 풀어 매듭 하나를 지었다. 응이라는 뜻이었다. 무엇에 대한 응인지가 없었다. 소하는 매듭을 풀었다.
매듭 둘을 지었다.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닌 것은 돌에 새겨진 셋이었는데, 매듭 둘은 관이 센 수가 셋이라는 것도 손이 센 수가 넷이라는 것도 나르지 못했다. 소하는 그것도 풀었다.
매듭 셋을 지었다. 어머니를 부르는 매듭이었다. 불러 온다 한들 그 셈이 돌에 올라가지는 않았다. 매듭을 푸는 동안 그림자가 돌 턱 위를 한 뼘 지나갔다.
못으로는 쓸 수 없었다. 흙바닥 글씨는 이미 죽었고 남은 것은 손에 든 끈뿐이었다. 소하는 끈을 펴서 눌린 자국들을 손끝으로 훑어 내렸다.
소하는 헌 매듭 사이사이에 새 매듭을 지어 넷을 만들었다. 왼손은 감각이 없어 끈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고, 오른손이 매듭을 조이는 동안 눈으로 끈을 지켜보아야 했다.
매듭을 다 짓자 마디마다 끈 올이 눌려 희게 패어 있었다. 소하는 끈을 오른팔 팔뚝에 감아 매듭 넷이 나란히 놓이게 하고 남은 끝을 팔 밑으로 밀어 넣었다.
소하는 아침에 지고 온 나무틀을 어깨에 올렸다. 멜빵이 팔뚝을 가로질러 매듭 위에 얹혔다. 소하는 틀에 못주머니를 매달고 마당을 한 바퀴 돌았다.
돌아왔을 때 멜빵 밑이 저렸다. 틀을 내려놓고 끈을 풀자 팔뚝에 붉은 자국이 넷 남아 있었다. 골마다 끈 올이 패었고 그 사이 살이 희게 솟아 있었다.
소하는 왼손으로 자국을 차례로 눌러 보았다. 눌러도 들어가지 않는 골이었고 끈 결이 살 위에 새겨진 채 그대로 마르고 있었다.
소하는 일어나 기록관 앞에 서서 담 너머 부엌 우물 쪽을 손바닥으로 가리키고, 그 손을 낮은 돌담 높이에서 천천히 가라앉혔다. 물길이 그리로 내려앉았다는 뜻이었다.
그러고는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고 오른팔을 내밀었다. 자국 넷이 저녁볕에 선명했다. 광대뼈 밑 마른 상처도 볕을 받아 벌어져 있었고, 기록관의 눈은 그 얼굴을 지나 팔로 내려갔다.
기록관의 입 모양이 끊어 읽혔다. "손으로 짚은 것은 증거로 삼지 않습니다." 소하는 팔을 내리지 않았다.
기록관의 손끝이 자국을 위에서 아래로 차례로 짚어 내려갔다. 마지막 자국에서 손끝이 멈췄다. 입술이 또박또박 읽혔다. "다만 이것은 짚은 것이 아니라 몸에 난 것입니다. 몸에 난 것은 어제 제가 서판에 옮겨 적었습니다."
기록관은 허리춤에서 못을 꺼내 홈 셋 아래 맨돌에 댔다. 못끝이 닿자 돌가루가 일었다. 나란한 줄이 그어지고 그 아래로 한 줄이 더 파였다. 홈은 넷이 되었다.

기록관의 눈이 팔에서 돌로, 돌에서 팔로 오갔다. 입 모양이 또박또박 이어졌다. "삽이 닿은 곳은 셋입니다. 물길이 끊긴 곳은 넷입니다." 소하는 그 입가를 끝까지 좇았다.
홈이 길어질 때마다 자국이 팔뚝 위에서 욱신거렸고, 돌가루가 소매 끝에 내려앉아 붉은 살갗 위에 희게 붙었다. 새김이 끝나 왼손 끝으로 홈을 훑으니 넷째 줄이 돌에 들어앉아 있었다.
저물녘에 소하는 왼팔 안쪽을 짚었다. 위쪽은 스물여섯, 아래쪽은 스물일곱이었다. 삽은 셋을 먹었는데 물이 닿아 있던 자리는 넷이 빠졌다.
관이 센 열 밤은 서른을 하루 셋으로 나눈 수였다. 하루에 넷씩 빠지면 그 셈은 열 밤이 아니었다. 소하는 돌 턱의 넷째 홈을 손끝으로 훑었다. 돌에는 넷이 적혀 있었고, 그 넷을 열 밤에 대 볼 사람은 아직 마당에 없었다.
돌담 너머에서 뒷문이 열리며 어머니가 나왔다. 빈손이었다. 어머니는 부엌 우물 턱까지 걸어가 그 앞에 서더니 두레박을 내리지 않고 돌담 이쪽을 건너다보았다. 소하는 걷어 올린 소매를 그제야 손목까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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