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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성이 없어서 벽을 지납니다
    36화 · 2026년 10월 2일

    지워진 밤

    기록관이 돌에 남은 홈을 읽고 있었다. 젖은 헝겊으로 돌가루를 닦아 내자 가장 아래 새긴 자리가 또렷해졌다. 어제는 소하의 팔에 있던 것이 이제는 누구나 지나가며 손끝으로 읽을 수 있는 자리에 놓였다.

    돌 옆에는 어제 받은 차례가 아직 남아 있었다. 인부가 삽 자루로 그 차례를 가리켰으나 기록관은 손바닥을 펴서 기다리라고 했다. 삽날이 흙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가 돌 위와 서판 아래를 다시 맞대 보기 시작했다.

    그는 담 앞의 메운 우물로 가서 흙이 닿은 벽을 살폈다. 다시 돌로 돌아와 홈을 훑었다. 관 마당의 삽은 아직 땅에 꽂혀 있었고, 인부들은 그가 가리킬 자리만 기다리고 있었다.

    소하는 우물 턱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어제 팔뚝에 낸 자국은 옷 아래서도 욱신거렸다. 손끝은 아직 벗겨져 있었고, 광대뼈 밑으로 땀이 흐를 때면 마른 상처가 당겼다.

    기록관은 서판에 적힌 작업 순서와 돌의 홈을 번갈아 짚었다. 서판의 빈칸에 못끝을 댔다가 떼고, 소하네 부엌으로 이어진 낮은 담을 가리켰다. 소하는 입술이 보이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록관의 입 모양이 느리게 이어졌다. 흙이 들어간 곳보다 물길이 끊긴 곳이 많다는 말이었다. 그는 소하를 보지 않고 은실 세 줄이 들어오는 문 쪽을 보고 있었다.

    그 문으로 은실 세 줄이 들어왔다. 기록관은 돌의 마지막 홈을 짚은 손을 떼지 않고 서판을 내밀었다. 은실 세 줄은 어제 새긴 자리부터 읽은 뒤 담 너머 부엌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어제 마당을 떠날 때 은실 세 줄은 소하의 팔보다 돌을 오래 보지 않았다. 지금은 돌에 새겨진 자국을 끝까지 훑은 뒤, 비어 있는 서판의 날짜 칸에 손끝을 멈췄다. 기록관이 가리킨 곳도 바로 거기였다.

    관 마당의 우물 턱에 새겨진 홈을 기록관이 손끝으로 읽고, 곁에서 소하가 지켜보는 모습
    돌에 남은 자리가 관의 날짜를 바꿨다.

    소하는 그 사이 돌 턱에 오른손을 얹었다. 열아홉을 세고서야 닿음이 올라왔다. 손을 떼고도 돌의 거친 알갱이가 살갗에 붙어 있는 듯해서 손바닥을 옷자락에 비볐다.

    은실 세 줄의 입술이 기록관 쪽으로 돌아갔다. 삽이 닿지 않은 곳까지 끊겼으니 어제 세운 날짜도 고쳐야 한다는 말이 읽혔다. 기록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판의 끝을 바닥에 댔다.

    은실 세 줄은 관 안에서 끝난 일인지 물었다. 소하는 입 모양을 읽고 집 쪽을 가리켰다. 기록관이 소하의 손을 따라 담 너머를 보았다. 관 사람의 발이 닿지 않은 곳에도 빈 두레박이 있었다.

    짐꾼은 어물전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멜대 한쪽에는 소금 묻은 빈 광주리가 매달렸고 다른 쪽에는 부엌에서 부탁받은 물동이가 걸려 있었다. 관 마당으로 곧장 들어오지 않고 소하네 뒷문에서 걸음을 멈췄다.

    소하가 다니던 어물전에는 그가 비운 자리에 새 사람이 들어왔을 터였다. 짐꾼의 멜대에 달린 광주리는 예전처럼 소하가 아침마다 나르던 것이었다. 멜대의 자국은 짐꾼의 어깨에 옮겨 앉았고, 소하는 담 너머에서 그 자국을 보았다.

    어머니가 두레박을 올리는 동안 짐꾼은 물동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두레박의 바닥은 젖었으나 물동이에 옮길 것은 거의 없었다. 소하는 담의 이쪽에서 어머니가 물동이 대신 짐꾼의 빈 광주리를 손끝으로 밀어 돌려주는 것을 보았다.

    짐꾼은 담 쪽으로 돌아서 소하의 눈을 찾았다. 입가가 멀어 몇 글자는 읽히지 않았다. 가까이 오자 느린 하오체가 잡혔다. "가게 물은 내가 구하겠소. 그쪽 물동이는 여기 두겠소."

    소하는 고개를 저었다. 짐꾼의 물동이가 가게로 가면 부엌에는 빈 그릇만 남는다. 그는 멜대에서 동이를 내려 부엌 문 앞에 세웠다. 짐꾼이 어물전 쪽을 가리켰지만 소하는 동이의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어머니가 문에서 나왔다. 소하의 오른손이 손잡이에서 천천히 풀리는 것을 보고는 왼손으로 동이를 끌어당겼다. 소하가 받은 입 모양은 짧았다. "일하러 가라."

    소하는 동이를 도로 들지 않았다. 대신 짐꾼에게 빈 광주리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젖은 자루 바닥에 소금 결정이 붙어 손가락 끝을 긁었다. 오늘 처음 손에 걸린 결이었다.

    광주리를 우물 턱에 엎어 놓자 납작한 바닥이 돌 위에 붙었다. 그는 광주리 테와 돌 사이에 손가락을 끼워 틈을 잡아 보았다. 어머니가 물동이를 당길 때 돌을 떠나는 쪽으로 결을 옮겨 보려 했다.

    바닥이 들리며 결이 잠깐 붙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동이를 들지 않고 문 안으로 밀어 두었다. 움직임이 멎자 소하의 손가락만 광주리 밑에 끼었다. 손을 빼려 할수록 거친 테가 벗겨진 살갗을 눌렀다.

    짐꾼이 광주리를 들어 주었다. 소하의 손가락 뿌리에는 삼베 결을 따라 얕은 피가 맺혔다. 소하는 손을 입술에 대려다 멈추고, 광주리를 짐꾼의 멜대에 다시 걸었다. 틈이 열렸던 짧은 동안에도 부엌의 물은 돌아오지 않았다.

    짐꾼은 가게로 돌아서기 전에 소하를 보았다. 오늘 장사는 자기 몫이라며 관 마당을 턱으로 가리켰다. 부엌 우물의 물은 빈 광주리에 담아 올 수 없다는 입 모양을 읽고 소하는 멜대 끝을 밀어 길을 내주었다.

    관 마당에서는 기록관이 어제의 작업 순서를 지우고 있었다. 서판에 먹인 선은 물을 묻혀도 흐려지지 않아, 그는 새 줄을 아래에 파며 오래된 줄 위에 가로획을 새겼다. 인부들은 삽을 들고도 어느 우물로 가야 할지 몰라 그 곁에 섰다.

    소하는 돌 턱에 새긴 홈을 손가락 대신 눈으로 좇았다. 어제 그 홈을 얻느라 팔에 낸 자국이 옷자락에 쓸렸다. 그가 한 일은 이미 기록에 있었다. 이제 관이 그 기록으로 무엇을 할지가 남았다.

    은실 세 줄이 손짓해 기록관을 불렀다. 어제는 메운 자리보다 끊긴 물길이 많았고, 오늘도 삽을 같은 수만큼 넣으면 날짜에서 빠진 곳이 생긴다는 입 모양이었다. 소하는 입가와 서판 위를 번갈아 보았다.

    기록관이 입 모양을 분명히 했다. "관의 날짜는 삽이 아니라 끊긴 물길로 세겠습니다. 어제 날짜를 다시 적고 남은 물길부터 고쳐야 합니다." 인부 하나가 든 삽을 땅에 내려놓았다.

    은실 세 줄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돌의 홈을 다시 읽고 마당 끝에 놓인 메울 우물 표를 돌려놓았다. 표의 앞면에는 삽을 대야 할 차례가 있었고 뒷면은 비어 있었다.

    관이 정한 밤을 기다리는 집에는 아직 우물 바닥의 물이 남아 있었다. 날짜가 맞다는 말을 믿고 물동이를 비워 둔 집도 있었다. 메울 차례를 고치지 않으면 그 집들은 삽이 오기 전에 빈 두레박을 먼저 보게 된다. 소하는 자기 집에서 이미 본 바닥을 떠올렸다.

    "메우면 저쪽에 자리가 얹힌다는 뜻입니까." 은실 세 줄이 기록관에게 묻는 입 모양이 소하에게도 읽혔다. 기록관은 그 질문을 듣고 서판에서 손을 뗐다.

    "어제는 메운 곳보다 끊긴 곳이 더 많습니다. 그만큼 저쪽에도 더 얹혔습니다." 기록관은 담 너머를 가리키지 않았다. 자기 서판에 막 새긴 홈 아래 손톱을 대고 있었다.

    소하는 팔뚝을 다시 드러내려 했다. 소매가 자국 위에 걸려 펴지지 않았다. 팔을 조금 더 올리자 어제 눌린 골과 오늘 옷깃에 쓸린 자리가 겹쳐 붉은 면으로 번졌다. 이제 이 몸에 새 줄을 내도 기록관은 어느 날의 값인지 가를 수 없었다.

    기록관이 고개를 들었다. 소하의 팔을 보고는 서판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오늘은 그 팔을 장부에 얹지 않겠다는 입 모양이었다. 어제 적은 것만으로 관의 셈이 틀렸다고 그는 제 서판을 짚었다. 소하는 걷어 올린 소매를 그대로 두었다.

    은실 세 줄은 인부들이 쥔 삽 자루를 둘러보았다. "오늘 메우기로 한 자리는 손대지 마십시오. 관 안의 물이 먼저 끊긴 곳부터 사람을 보내 확인하겠습니다. 내일부터도 이 장부에서 빠진 곳을 다시 셉니다."

    인부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새벽부터 기다리던 삽날이 마당에 누웠다. 은실 세 줄은 메울 우물 표를 기록관에게 건넸고, 기록관은 표 뒤의 빈 면에 어제 빠진 자리부터 새겼다. 지시가 물러나기 전에 마당의 손들이 이미 달라진 일을 하고 있었다.

    돌아설 채비를 한 인부가 기록관에게 서판을 내밀어 보였다. 자기 몫으로 적힌 집의 이름이었다. 기록관은 그 이름에 그어진 메울 선을 지우고, 물이 있는지 먼저 확인할 집이라는 표시를 남겼다. 인부는 삽을 담에 기대고 빈손으로 골목에 나갔다.

    소하는 손바닥을 펴 보았다. 광주리 테에 눌린 새 상처가 흉하게 벌어져 있었다. 그것으로 옮기려던 결은 실패했지만, 기록관은 제 기록만으로 말을 끝냈다. 소하는 손을 감출 이유가 없어졌다.

    해가 기울자 이름꾼이 문으로 들어왔다. 한쪽 다리를 조금 끌었고, 허리에는 자를 매지 않았다. 그는 마당에 누운 삽들을 보더니 기록관이 붙든 새 서판 쪽으로 갔다.

    소하는 이름꾼이 서판을 읽는 동안 앞으로 가지 않았다. 이름꾼이 눈을 들어 소하를 찾자 그제야 다가갔다. 입술이 익숙한 속도로 읽혔다. "남은 일을 내가 다 맡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부르러 왔습니다."

    이름꾼은 관 안에서 물이 끊긴 집을 가리켰다. 소하가 집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머니가 뒷문 앞에 서 있었다. 낮에 들여 둔 물동이가 문턱 안쪽에 그대로 놓였고, 두레박 줄은 턱 위에서 마른 채였다.

    소하는 왼팔 안쪽을 짚었다. 위쪽은 스물여섯, 아래쪽은 스물일곱이었다. 남은 자리의 셈은 아침과 같았지만 관이 적은 날짜는 이미 고쳐졌다. 이름꾼이 기다리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오른손이 문턱을 짚지 못하고 허공을 훑었다.

    스물셋을 세고서야 닿음이 올라왔다. 손은 문턱을 놓친 뒤였다. 소하는 왼쪽 어깨로 문설주를 받치고 몸을 일으켰다. 오른손은 팔꿈치 밑에서 느리게 따라왔다.

    기록관은 사람을 보내야 할 집을 서판에 옮겨 적고, 은실 세 줄은 삽 든 사람들을 돌려세웠다. 소하가 세어 낸 값은 그들의 작업을 이미 바꾸었다. 관 문에서 밀려 나오는 인부들 사이로 짐꾼의 빈 광주리가 저물녘 어물전 쪽으로 흔들렸다.

    어머니는 소하의 손이 늦게 따라오는 것을 보고도 물동이를 들지 않았다. 이름꾼이 문밖에서 발을 멈추자 소하는 어깨로 문설주를 밀어 몸을 빼냈다. 문턱에 남은 피가 마르기 전에, 관에서 보낸 사람들의 발자국이 골목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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