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한 번
담에 기대어 서 있던 삽들이 아침에는 없었다. 자루 끝이 눌러 두었던 자리마다 흙이 꺼져 있었고, 이슬이 마르며 테두리만 희게 남았다. 소하는 빈 담을 따라 걸으며 그 자리를 세어 보았다.
인부들은 골목으로 나가는 문 앞에 모여 있었다. 삽 대신 쇠지렛대를 쥐었고 어깨마다 빈 두레박이 걸렸다. 기록관이 집 이름을 짚자 그들은 갈라서서 문을 나갔다.
소하는 그 뒤를 따라 골목 그늘로 들어섰다. 왼팔 안쪽을 짚자 위쪽은 스물여섯, 아래쪽은 스물일곱이었다. 관이 날짜를 고친 뒤로 삽은 흙에 들어가지 않았다.
오른손 엄지로 담벼락 모서리를 눌러 보았다. 스물둘을 세고서야 닿음이 올라왔다. 밤이 한 박자를 덜어 주고 낮이 그보다 많이 얹는 것이 요새의 셈이었다.
골목 어귀 집 우물에는 덮개돌이 얹혀 있었다. 얹어 둔 지 오래라 가장자리로 이끼가 자라 턱에 붙었고, 인부들이 지렛대를 밀어 넣자 이끼가 찢어졌다.
지렛대가 들리는 쪽에서 돌과 턱 사이가 벌어졌고, 반대쪽은 턱 위를 긁으며 밀려 나갔다. 소하는 밀려 나가는 쪽에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펴서 돌이 지나갈 길에 받쳤다.

돌은 인부들이 미는 만큼만 움직였고 멈추는 때도 그들이 정했다. 눈을 감자 돌이 손등을 덮으며 손바닥과 돌 사이가 좁아졌다. 지렛대가 꺾일 때마다 폭이 달라졌고, 그 폭은 소하가 정하지 않았다.
결이 걸렸다. 걸리자마자 소하는 그것이 발밑 우물의 것이 아님을 알았다. 손바닥 밑에서 올라온 것이 아니고, 몇 집 건너온 쪽에서 옆으로 비껴 들어온 결이었다.
눈을 뜨지 않고 그 결을 따라가자 끊긴 자리가 있었다. 덮개돌이 그대로 얹힌 우물이었고, 기록관이 아침에 읽은 이름에 없는 집이었다.
손을 뽑자 돌 밑에 눌린 손바닥 가장자리에서 살갗이 밀려 있었다. 방금 센 것을 되짚자 발밑 우물의 결과 건너온 결이 겹쳐 있어 어느 쪽인지 갈리지 않았다. 그 자리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짚어야 했다.
뚜껑이 벗겨진 우물 안으로 공기가 빨려 들어갔다. 턱에 얹은 손등의 솜털이 안쪽으로 누웠고, 손을 뒤집어 대 보아도 바람은 한쪽으로만 갔다.
해가 골목 안까지 들어왔다. 인부들은 세 집을 건너뛰고 다음 덮개돌 앞에 섰다. 소하는 아침에 결이 걸렸던 집 앞에 섰다가 지렛대 쪽으로 돌아갔다.
다음 돌은 턱보다 작아서, 지렛대가 들리면 턱 안쪽으로 미끄러져 내려앉았다. 아침 돌과는 기울어지는 방향이 반대였다.
아침에는 사이가 넓은 데서 좁아져 멀리 있는 것이 먼저 들어왔다고 소하는 보았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손을 받치는 자리뿐이어서, 이번에는 내려앉는 쪽에 손을 넣었다.
손등을 턱 안쪽 벽에 붙이고 손바닥을 위로 폈다. 지렛대가 꺾이자 돌이 내려오면서 손등과 벽 사이가, 손바닥과 돌 사이가 한꺼번에 좁아졌다. 소하는 눈을 감았다.
결이 밑에서 곧장 올라왔다. 때를 쫓지 않고 자리를 짚자 우물 벽을 따라 내려가던 물길이 중간에서 끊겼고, 끊긴 끝은 아무 데로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 손으로 왼팔을 더듬을 수는 없어 소하는 숨을 멈추고 수만 붙잡았다. 어제 저녁에 받은 위쪽 값에서 이 우물을 덜면 스물다섯이어야 했다. 손끝에 오는 것은 스물넷이었다.
한 자리가 더 빠져 있었다. 아침에 비껴 들어온 그 집이었다. 삽은 어제부터 흙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하루 사이 둘이 빠졌고, 모두 쇠가 닿은 적 없는 자리였다.
돌이 끝까지 내려앉았다. 손등이 턱 안쪽 벽과 돌 사이에 눌렸고, 인부들이 지렛대를 다시 걸 때까지 손을 뺄 수 없었다. 빼낸 손등에는 벽의 모난 자리가 푸르게 찍혀 있었다.
바람이 멎어 있었다. 아침에 손등의 털을 눕히던 것이 사라져서, 벗겨진 입구에 손을 대도 안팎 사이에 오가는 것이 없었다.
소하는 기록관 앞으로 가서 눌린 오른손을 펴 천천히 가라앉혔다. 물길이 내려앉아 끊겼다는 뜻이었다. 이어서 건너뛴 집 쪽으로 손끝을 돌려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기록관의 눈이 소하의 손을 따라갔다가 서판으로 돌아왔다. 못끝이 건너뛴 세 집 위에서 멎었고 소하는 입가를 좇았다. "오늘 열 집 가운데 아홉만 열었습니다. 남은 셋은 장부에 물이 있다고 적힌 집입니다."
소하는 왼손 손가락 둘을 펴서 그대로 들어 보였다. 기록관은 그것을 세고, 들고 있던 못을 허리춤에 꽂은 뒤 인부를 불러 건너뛴 집 쪽을 가리켰다.
지렛대가 그 돌 밑으로 들어갔다. 두레박이 내려가 줄이 끝까지 풀렸으나 바닥은 마른 채였다. 기록관은 그 집 이름 아래 홈을 팠다.
골목 어귀 담 밑에서 누가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 하다가 그만두었다. 무명이었다. 세운 무릎 위의 손이 세던 자리에서 멎은 채였고, 소하가 옆에 서도 내리지 않았다.
무명이 먼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소하 쪽으로 돌렸다. 오늘 제 발밑에서 걷힌 수였다. 소하는 오른손 손가락 둘을 펴서 주먹을 땅으로 눌러 내렸다. 무명의 눈이 펴진 둘에서 제 하나로 내려갔다.
입 모양이 천천히 풀렸다. "내 발밑에서 걷힌 널은 한 장이오. 그대 손에 둘이면, 하나는 내가 못 센 것이오." 소하는 그 입가를 좇았다.
소하는 골목 안쪽 닫힌 돌 쪽으로 손바닥을 밀어 보였다. 쇠가 닿지 않았다는 뜻을 손짓으로 낼 방법은 그것뿐이었고, 무명은 손끝이 멈춘 집을 오래 보았다.
"우리 쪽 다리는 건널 때마다 발밑 널이 한 장씩 걷히고 다시 놓이지 않소. 나는 걷힌 것을 센 적이 없소. 발밑에서 소리가 난 것만 세어 놓고 여섯 해 동안 그것을 남은 널이라 불렀소." 소하는 입가를 읽었다.
무명의 손이 무릎 위에서 널을 세듯 허공을 두드리다 멎었다. 다시 처음부터 셌을 때는 더 빨리 멎었고, 그다음에는 아예 손을 들지 않았다.
무명은 무릎을 펴고 일어나 골목 안쪽으로 턱을 들어 보였다. 걸음은 담 그늘을 따라 닫힌 돌 쪽으로 멀어졌다.
해가 기울 무렵 이름꾼이 골목으로 들어왔다. 허리에 자가 없었고 어제처럼 다리를 끌었다. 인부들이 길을 비켜섰고 기록관은 서판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소하는 그때 덮개돌 턱에 오른손을 얹고 있었다. 인부들이 돌을 도로 덮는 중이었고, 덮이는 동안의 사이를 잡으려고 손을 빼지 않고 있었다.
이름꾼이 서너 걸음 앞에서 멈췄다. 소하는 턱에 손을 둔 채 고개만 돌렸고, 저물녘 빛 속에서 자기 이름의 모양을 보았다.
손목이 잡혔다. 소하는 들숨 하나를 들이쉬며 그 무게가 어디까지 올라오는지 스스로 더듬었다. 손목에 한 겹이 감겼고 팔꿈치 위로는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손은 떼지 않았다.
들숨이 끝나기 전에 무게가 풀렸다. 손바닥은 턱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돌이 내려앉는 결도 끊기지 않았다. 붙잡힌 채로 결을 놓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고, 그 뒤로 손끝이 돌에 닿아 있는지를 눈으로 보아야 알았다.
"처음 사람을 불렀을 때는 선 자리에서 몸이 통째로 멎었습니다. 그다음에는 어깨까지였고, 그다음에는 팔꿈치였습니다. 오늘은 손목입니다." 소하가 입가를 좇는 동안 이름꾼이 소매에서 손가락 하나를 꺼내 폈다. "둘이 남아 있었습니다. 방금 하나를 썼으니 하나 남았습니다. 어디에 쓸지는 오늘 정하려고 왔습니다."
소하는 돌 턱에서 손을 떼고 일어섰다. 무릎을 짚고 올라오는 동안 팔꿈치 밑이 늦게 따라왔고, 일어선 뒤에도 눌린 자리가 굳어 손이 반쯤 오므라져 있었다.
이름꾼의 입 모양이 잠깐 멎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남은 한 번은 동생에게 쓰겠습니다." 소하는 그 말을 받기 전에 이미 손을 뻗고 있었다.
손이 이름꾼의 소매를 지나갔다. 스물여섯을 세고서야 천이 손끝에 왔고 소매는 이미 뒤에 있었다. 이름꾼은 제 옷을 지나간 손을 보고서 한발 늦게 팔을 내밀어 받쳤다.
소하는 받쳐진 손을 거두어 허리춤의 끈을 풀었다. 왼손에 감각이 없어 끈이 흘렀고, 조이는 동안 눈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눌린 손등은 당길 때마다 욱신거렸다.
매듭 하나가 지어졌다. 풀지 않고 그 아래 또 지었다. 끈 끝이 말려 올라가 매듭 둘이 나란히 섰고, 소하는 그것을 이름꾼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름꾼은 매듭을 눌러 보고도 손을 내리지 않았고 입 모양이 또박또박 읽혔다. "육 년 전에도 그 애는 미정이었고, 열이틀 전에 세 번 불렀을 때는 아예 오지 않았습니다. 그 매듭은 제가 피해 온 답입니다. 그래도 까닭은 받아야겠습니다."
소하는 소매를 걷었다. 어제 겹쳐 번진 붉은 면 위에는 셀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매듭 셋을 지어 보였다가 도로 풀었다. 어머니를 부르는 뜻이라 까닭 자리에 놓을 것이 못 되었다.
허리춤에 못은 있었고 땅은 젖어 있었다. 어느 것도 오늘 그 손에서는 글자가 되지 않았다. 소하는 매듭을 이름꾼의 손에 둔 채 기록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기록관이 허리춤에서 못을 도로 뽑았다. 소하의 손바닥이 담 너머로 밀려 나가다가 중간에서 멈췄다. 손은 한 박자를 머물렀다가 다시 갔고, 멈췄던 자리를 지난 뒤로는 끝까지 갔다.
기록관은 그 손끝을 따라가며 받아 새겼다. "두 번째 미정이 제 몫과 남의 몫을 혼자 보내고 있습니다." 돌가루가 이는 동안 소하는 멈추라는 손짓을 하지 않았다.
여울이 막은 것은 언니에게 적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제 그것은 언니에게만 가는 말이 아니라 관의 돌에 들어갔고, 새긴 것은 지워지지 않는다. 소하는 새 홈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름꾼이 돌 앞으로 가서 그 홈을 읽었다. 돌아서는 입 모양이 또박또박 읽혔다. "남은 한 번은 그대에게 쓰겠습니다. 불러서 어디까지 오는지를 재겠습니다. 아무 데도 안 걸리는 날이 건너간 날입니다."
소하는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거기서 풀린 것을 본 사람이 둘이었고, 둘 다 그 눈금이 몇 번 안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눈금이 다 되는 날 그 부름은 아무 데도 안 걸린다.
소하는 끈을 더 짓지 않았다. 이름꾼이 관 마당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덮개돌 위에 손을 얹었다. 돌은 다 덮여 있어 좁아질 사이가 남지 않았다.
골목 끝에는 아침에 비껴 들어온 그 집이 있었다. 덮개돌은 치워졌고 인부들은 떠난 뒤였다. 무릎을 세우고 앉은 사람이 그 턱 앞에 있었다.
무명이 팔을 우물 안으로 넣었다. 어깨까지 들어갔다 나왔고, 잠시 뒤 반 걸음 옮겨 다시 넣었다. 마지막에는 턱 위에 엎드려 상체를 밀어 넣었다가 한참 만에 일어났다.
어깨와 앞섶에 묻은 이끼가 왼쪽 옷자락을 가로질러 번졌고 무명은 털지 않았다. 소하는 담 모퉁이에서 그가 일어설 때마다 늘어나는 자국을 보았다.
우물에서 바람이 거꾸로 올라왔다. 아침에 안으로 빨려 들어가던 것이 턱을 넘어 밖으로 나왔고, 소하의 목덜미에서 땀이 마르는 자리가 생겼다.
무명이 소하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입가가 가까워졌다. "우리 쪽에서는 떠난 사람 자리에 그릇을 엎어 두오. 돌아올 사람 것이면 바로 놓고, 아니면 엎소. 내가 기다리던 날은 지난봄 어디쯤에 지나갔소."
무명은 여섯 해 동안 무릎을 세우고 앉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왼쪽으로 여며 있던 옷깃을 풀어 앞섶을 벌리고, 오른쪽 자락을 끌어다 그 위로 겹쳐 여몄다. 자락을 잡는 손이 두 번 미끄러졌다가 세 번째에 제자리를 찾았고, 그는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뒤 우물을 등지고 골목 그늘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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