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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성이 없어서 벽을 지납니다
    38화 · 2026년 10월 5일

    같은 쪽

    관 마당 저편에서 은실 세 줄과 기록관이 마주 서 있었다. 소하가 선 자리에서는 은실 세 줄의 입가만 겨우 잡혔고 그것도 토막으로 왔다. 문 안쪽이라는 토막이 떨어졌고 그 앞에 무엇이 붙었는지는 놓쳤다. 기록관 쪽에서는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다만 그의 손끝이 서판 위를 내려가다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서 멎었고, 멎은 자리에서 더 내려가지 않았다. 소하가 몇 걸음 다가서는 사이 은실 세 줄이 돌아섰다.

    그 등은 마당을 가로질러 뒤뜰로 이어진 길 쪽으로 갔다. 소하는 따라가지 않고 어제 홈을 판 돌 앞에 섰다. 돌가루가 아직 홈 안에 남아 있었고, 밤이슬이 내려앉았다 마르면서 가루가 굳어 글자의 골이 더 뚜렷해져 있었다.

    소하는 걸음을 멈추고 왼팔 안쪽을 짚었다. 위쪽은 스물넷, 아래쪽은 스물여섯이었다. 어제 저물녘에 받은 것은 위쪽이 같고 아래쪽이 스물일곱이었으니, 밤 사이 아래쪽만 하나가 빠진 셈이었다.

    여태 빠지는 데에는 차례가 있었다. 물이 닿아 있는 자리가 먼저 꺼지고, 이쪽에 서 있는 자리가 반나절이나 하루 뒤에 따라 내려왔다. 소하는 그 차례를 여러 날 세어 두었고 거꾸로 온 적이 없었다. 오늘 아침은 뒤가 먼저 왔다. 소하는 돌 앞을 떠나 부엌으로 이어진 낮은 담 쪽으로 갔다.

    담을 넘어 부엌 우물 턱에 오른손 손바닥을 폈다. 두레박이 바닥만 긁게 된 뒤로도 이쪽에 선 자리는 남아 있던 우물이다. 손바닥 밑에서 밤 사이 움직인 것은 없었다. 거기서 손을 떼어 담 하나 건너 물길이 끊긴 이웃 우물 턱으로 옮겨 가도 같았다.

    손을 떼면서 스물다섯을 세고서야 돌의 찬 기운이 손바닥 안으로 들어왔다. 물이 끊긴 자리들에서 밤 사이 빠진 것이 없으면 빠진 데는 손이 아직 안 간 쪽이다. 소하가 고개를 들었을 때 인부들의 발길은 이미 뒤뜰 쪽으로 꺾여 있었다.

    뒤뜰로 가는 좁은 길에 인부들이 늘어서 있었다. 어깨에 삽이 없었고 대신 흙을 담은 가마니를 맞들어 날랐다. 가마니 밑바닥이 땅에 끌리며 자국이 길게 이어졌고, 그 자국은 못을 박아 잠가 두었던 나무문 앞에서 끊겼다.

    문은 열려 있었다. 뽑힌 못들이 문설주 밑에 모여 있었고 벌어진 틈으로 안쪽이 보였다. 바깥에는 이미 해가 들어와 있는데 문턱 너머로는 그 빛이 한 뼘도 못 들어가 검었다. 소하는 문턱을 넘고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눈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물 턱의 윤곽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바닥에 깔린 돌이 나왔다.

    인부들이 가마니를 우물 턱 위로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밑을 받치는 사람과 테를 잡아당기는 사람이 갈려서, 당기는 쪽이 허리를 젖힐 때마다 밑바닥이 턱의 모서리를 긁으며 올라갔다. 쏟아 낸 뒤에는 빈 가마니를 접어 문밖으로 던졌고, 던진 자리에서 흙가루가 떠올라 문틈의 빛줄기 안에서만 보였다.

    소하는 턱에 손을 얹고 가마니가 지나갈 자리에 손등을 두었다. 밑바닥과 손등 사이가 좁아졌다. 좁히는 것은 인부들의 팔이었고 어디서 멈추는지도 그들이 정했다. 소하는 눈을 감았다. 감은 쪽이 뜬 쪽보다 오히려 밝게 느껴지는 어둠이었다.

    문 안쪽 어두운 광의 우물 턱 위로 인부 둘이 흙 가마니를 끌어 올려 쏟고, 턱 끝에 앉은 소하가 가마니가 지나갈 자리에 오른손 손등을 얹은 채 눈을 감고 있다
    좁히는 것은 그의 팔이 아니었다.

    왼손을 먼저 넣었다. 새끼손가락 마지막 마디로 가마니 밑을 짚었다. 저쪽에 남아 있는 그 마디는 저쪽에서 저절로 좁아지는 사이를 짚어 온 손이었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놓친 것과는 달랐다. 놓치려면 지나가는 것이 먼저 있어야 하는데 그 마디 쪽에는 지나가는 것 자체가 없었다. 돌에 새겨진 못자국 위에 손을 얹었을 때와 같은 빈 자리였다.

    가마니가 비워지고 다음 것이 올라왔다. 소하는 왼손을 빼고 오른손 손등을 같은 자리에 댔다. 어제 눌린 손가락 뿌리가 모서리에 닿아 욱신거렸으나 손을 틀지 않았다.

    결이 걸렸다. 아주 얇았다. 실을 반으로 가르고 또 반으로 가른 만큼 얇았는데, 오는 간격은 여울이 매듭으로 셈을 건네던 그 간격이었다. 길목에 다른 손이 앉은 뒤로 처음이었다. 소하는 가마니가 다 비워질 때까지 손등을 빼지 않았고, 삼베 올이 지나간 자리에서 살갗이 밀려 올라와 붉게 돋았다. 결을 붙잡고 버틴 만큼 오른손의 닿음이 한 박자 더 뒤로 밀렸다.

    턱에 얹은 손등 밑으로 흙이 쏟아져 내려가는 동안, 걸린 것은 흙의 결이 아니었다. 흙은 위에서 아래로 한 번에 지나가는데 그 얇은 것은 짧게 끊어졌다가 다시 왔고, 끊기는 자리마다 길이가 같았다. 소하는 그것을 붙잡아 두려고 손등에 힘을 뺐다.

    소하는 손을 그대로 둔 채 다음 가마니를 기다렸다가 왼손 마디로 바꿔 짚었다. 없었다. 오른손으로 돌아오자 또 걸렸고 아까보다 얇지도 두껍지도 않았다. 번갈아 짚는 동안 두 손의 답은 바뀌지 않았다.

    소하는 오른손을 턱에서 떼어 제 왼팔 안쪽에 얹었다. 팔 안쪽에서 맥이 뛰어 올라와 손등을 밀었고, 밀렸다 돌아올 때마다 손등과 살 사이가 좁아졌다 벌어졌다. 그 좁아짐이 손등에 걸렸다. 뛰는 것은 소하가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오른손을 떼고 왼손 새끼손가락 마디를 같은 자리에 댔다. 맥은 그대로 뛰는데 마디에는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소하는 두 손을 번갈아 세 번 더 바꿔 댔고 답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오른손 손등을 도로 턱에 얹어 얇은 결이 그 자리에 있는지 보고, 왼손은 옷섶 안쪽에 밀어 넣어 소매로 덮었다. 문틈의 빛줄기가 바닥을 가로질러 반대쪽 벽까지 올라가는 동안 그는 왼손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빛이 눈을 찔러 마당이 오래 흰 면으로만 보였다. 은실 세 줄과 기록관은 문 옆 돌 앞에 서 있었고, 어제 새긴 홈 위로 아침 그늘이 비껴 있었다. 기록관의 못끝이 그 홈의 머리를 짚고 있었다. 소하는 입가가 읽히는 쪽으로 돌아가 섰다.

    "한 사람이 제 몫과 남의 몫을 혼자 보내고 있다면, 지금 가장 큰 자리는 그 사람이 선 자리입니다." 은실 세 줄의 손끝이 홈을 따라 끝까지 갔다가 떨어졌다. "끊긴 물길로 세면 하루에 셋씩입니다. 남은 것을 그 셈으로 다 끊자면 열 밤이 듭니다. 그 자리를 끊는 데는 하루가 듭니다."

    소하는 돌 앞으로 가서 손바닥을 폈다. 왼쪽 끝에서 오른쪽으로 한 번 쓸어 차례를 그어 보이고, 맨 끝에 있던 손가락을 맨 앞으로 끌어왔다. 그러고는 나머지 손가락 전부를 끌려온 자리 뒤로 밀어 보냈다. 당긴 것이 앞으로 가면 뒤의 것들이 다 뒤로 간다는 뜻이었다.

    "차례를 앞으로 당기면 그 앞에 적힌 자리들이 뒤로 밀립니다." 기록관이 소하의 손끝을 따라가며 받아 서판에 옮겨 적었다. 적힌 줄이 길어질수록 은실 세 줄의 눈이 그 줄 위에 오래 머물렀다.

    "밀어 두십시오. 오늘 몫은 문 안쪽입니다."

    소하는 허리춤의 끈을 풀어 매듭 둘을 지었다. 손이 늦어 끈 끝이 거듭 빠져나갔고 나중에야 매듭이 섰다.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는 그것을 은실 세 줄의 눈높이로 들어 올려 보였다.

    은실 세 줄은 매듭을 끝까지 보고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빼 드리지는 않겠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그 말을 지키고 있습니다."

    기록관은 서판을 든 채 자기 발밑을 짚어 보듯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그 손이 못을 돌려 잡았고, 돌의 빈 면에 홈을 팔 자리를 눈으로 재고 있었다. 소하는 그 손을 빌릴 말을 고르다가 그만두었다. 어제 빌린 손이 돌에 넣은 한 줄이 오늘 아침에 인부들을 이 문 앞으로 데려왔다.

    소하는 돌아서서 다음 가마니의 테를 잡았다. 삼베가 손가락 사이에서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쥔 힘이 늦게 빠져서 손이 테를 따라 턱 위까지 끌려 올라갔다. 손목이 모서리에 걸리고서야 손가락이 풀렸다. 인부는 소하가 거기 있는 줄도 모르고 가마니를 기울였고, 흙이 쏟아지는 동안 울림이 소하의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무릎에서 멎었다.

    소하는 우물 턱에 등을 대고 바닥에 앉았다. 왼팔로 셈이 들어오는 자리를 열어 두고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쌓지 않았다. 여태 그 자리로 흘려보낸 것은 제 몫이었다. 제 몫을 다 보내고 나면 자리를 닫았고, 닫은 뒤에 오는 것은 받지 않았다.

    오늘은 닫지 않았다. 닫지 않은 자리로 다른 데서 보내던 것이 따라 들어왔다. 얼마가 들어오는지 소하는 모른다 — 흘려보내는 손에는 수가 조금도 안 남는다. 다만 들어오는 동안 왼팔 안쪽이 속에서부터 데인 것처럼 달아올랐고, 열이 가신 자리에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흰 면이 남았다. 눌러도 아프지 않고 가장자리가 아물어 붙지 않는 자리였다.

    눈을 감았는데도 눈앞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감은 어둠과 뜬 어둠이 자리를 바꿔 가며 번갈아 들어왔고, 그 사이에 팔이 저렸다. 소하는 수를 세지 않았다. 세면 머릿속에 남고, 남으면 흘러가지 않는다.

    한 박자 늦게 울림이 왼팔로 돌아왔다. 소하는 받는 것을 그만두려고 자리를 닫았다. 여태 닫을 때 쓰던 대로 팔을 몸 쪽으로 거두고 셈이 들어오던 쪽에서 손을 뗐는데 들어오는 것은 줄지 않았다. 팔을 바꿔 보고 숨을 멈춰 보고 턱에서 등을 떼어 보아도 같았다. 한 번 연 자리는 소하 쪽에서 닫히지 않았다.

    다시 턱 위로 손을 올렸다. 가마니 밑바닥이 손등을 스치며 지나갔고 결이 걸렸다. 아침의 것보다 더 얇았다. 반으로 가른 것을 또 반으로 가른 자리에서 다시 갈린 두께였고, 그다음 가마니에서도 같았다. 남의 몫이 들어오는 동안 오른손의 닿음은 두 박자가 더 뒤로 밀렸다. 소하는 왼손 마디를 꺼내 보지 않았다.

    문 안쪽의 어둠은 흙이 차오를수록 엷어졌다. 우물이 삼키고 있던 자리가 메워지면서 바닥에 고여 있던 검은 것이 밀려 올라왔고, 그 자리에 문틈으로 들어온 빛이 앉았다. 소하는 밝아지는 쪽을 보지 않으려고 등을 돌려 앉았다.

    흙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인부들이 접은 가마니를 겨드랑이에 끼고 나갔고, 뒤에 남은 사람이 돌아와 나무문을 끌어당겼다. 문짝이 문설주에 붙으며 안쪽이 다시 검어졌다. 소하는 문이 닫히기 전에 빠져나왔고, 나와서도 마당이 보이기까지 눈이 익는 데 시간이 걸렸다.

    저물녘에 왼팔 안쪽을 짚었다. 아래쪽은 스물다섯이었다. 손가락을 떼었다가 다시 대어도 같은 수가 왔고, 낮에 흰 면이 생긴 자리를 지나갈 때만 셈이 한 번 끊겼다가 이어졌다.

    기록관이 돌 아래에 새 홈을 팠다. 못끝이 멎은 뒤에도 그는 홈에서 손을 떼지 않았고, 돌가루가 바람에 날려 소하의 손등에 앉았다.

    소하는 문설주를 밀어 몸을 세웠다. 손바닥이 나무에 닿는 것을 눈으로 보고 스물여덟을 세고서야 나뭇결이 손금 안으로 들어왔다. 일어서는 동안 소매가 어깨에서 흘러내렸는데 그것도 흘러내린 뒤에 알았다.

    부엌에는 어머니가 먼저 와 있었다. 솥뚜껑이 열린 채였고 김이 낮은 천장에 닿았다가 벽을 타고 내려왔다. 어머니가 등잔의 심지를 손톱으로 집어 올리자 방 안의 어둠이 벽 쪽으로 물러났고, 밥상 위만 먼저 밝아졌다.

    소하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매듭도 짓지 않았고 손짓도 내지 않았다. 어머니는 소매 밖으로 나온 손등의 눌린 자리와 그 위에 앉은 돌가루를 보고도 묻지 않았다. 밥을 푸고, 소하 앞으로 그릇을 밀어 놓았다.

    "밥 먹어라."

    소하는 왼손으로 그릇을 받치고 오른손에 숟가락을 쥐었다. 숟가락이 밥에 들어간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손에 힘을 주었다. 어머니는 그 손을 흘깃 보고 등잔을 소하 쪽으로 조금 더 밀어 놓은 뒤 제 그릇을 들었다. 심지가 타들어 가며 밝은 자리가 조금씩 넓어졌고, 소하는 뜬 밥이 식기 전에 입으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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