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센 하나
밤에 마당은 발밑으로만 움직였다. 낮에 부은 물이 빠지면서 메운 흙이 그만큼씩 내려앉았고, 얹어 둔 돌이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멎었다가 한참 뒤에 다시 조금 기울었다. 담 밖에 서 있어도 그 떨림이 신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여태 소하는 이것을 수로만 알았다. 아침에 왼팔을 짚으면 간밤에 몇 자리가 비어 있었고, 비는 동안 마당에 사람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오늘은 그 위에 제 발로 서 보려고 나왔다.
어머니가 문을 반쯤 열고 안쪽에 서 있었다. 소하가 돌아보자 문틀을 짚고 몸을 내밀었다. "멀리 가지 마라."
이슬이 벌써 앉아 소매 끝이 무거웠다. 담 그늘을 따라 걷자 신코가 젖어 흙이 들러붙었고 몇 걸음마다 발을 털어야 했다. 목덜미에도 젖은 것이 앉았는데 땀처럼 안에서 번지지 않고 바깥에서 얹혔다.
담 모퉁이에 사람이 서 있었다. 옷깃을 오른쪽으로 겹쳐 여민 사람이었고, 무릎을 세우고 앉던 버릇은 보이지 않았다. 소하는 달빛이 비껴드는 쪽으로 돌아서서 그 얼굴에 제 눈높이를 맞췄다.
무명이 달빛 쪽으로 반 걸음 들어섰다. 그래야 소하가 받는다는 것을 아는 걸음이었다. "우리 쪽 밤은 마르오. 이슬이라는 것이 없소. 아침에 풀이 젖어 있으면 거기서 누가 울고 갔다고들 하오."
소하는 메운 자리 쪽으로 턱을 들어 보였다. 무명이 그쪽을 한참 보다가 발끝으로 땅을 눌렀다.
"여기서 저 돌까지가 어제는 한 걸음 더 멀었소." 달빛이 옅어 말끝은 반쯤 떨어져 나갔다. 무명은 걸음으로 재는 사람이 아니다. 걸음은 소하에게 보이려고 꺼내 쓰는 말이었다.
소하는 무명의 손목을 잡아 내려앉고 있는 흙 위로 끌어다 짚게 했다. 무명은 손을 빼지 않고 손바닥을 땅에 붙인 채 가만히 있었다.
"이 밑은 어제보다 한 자리만큼 가깝소." 손바닥이 땅에서 떨어졌고, 그 손은 다른 데를 더 짚으러 가지 않았다. "그 이상은 모르오. 나는 이제 세지 않소."
소하는 흙더미 앞에서 신을 벗어 옆에 두었다. 신을 신은 채로 땅에 맞붙는 것은 신 바닥이다. 그 사이로는 여태 아무것도 온 적이 없었다.
맨발로 디디자 이슬이 먼저 올라왔다. 소하는 기울어 가는 흙더미 가운데로 올라섰다. 아래가 비어 있는 자리라 발이 바로 꺼졌다. 얼마나 꺼질지는 흙이 정하고 있었다.

소하는 눈을 감으려다 멈췄다. 감으면 제가 흘려보낸 것이 한 박자 늦게 되돌아오는 것과 저쪽에서 처음 오는 것이 같이 들어온다. 어제 그것을 못 가렸다. 그렇다고 뜨면 그 사이가 눈에 잡힌 크기로 굳어 버린다. 어느 쪽이든 골라야 하는데 고를 수 있는 쪽은 한쪽뿐이었고, 소하는 눈꺼풀을 내렸다.
발바닥으로 올라온 것은 결이었다. 한 쌍이 먼저 오고, 반 박자 뒤에 또 한 쌍이 왔다. 앞의 쌍은 끊긴 자리와 그 옆자리의 선후였고, 뒤의 쌍도 모양이 그랬다.
소하는 그 둘을 겹쳐 보았다. 겹치는 데가 있었으나 끝이 조금 어긋났고, 어긋났으면 서로 다른 자리라는 뜻이었다. 여태 그렇게 가려 왔다. 밤 사이 끊긴 것은 둘이었다.
발을 뺐다. 흘러나가는 것이 오늘은 금세 그치지 않았다. 왼팔 안쪽이 길게 비워지는 동안 소하는 숨을 세면서 기다렸고, 다 나간 뒤에는 머릿속 어디가 헐거웠다. 무엇이 헐거운지는 그때 짚이지 않았다.
오른손은 이 일에 쓰이지 않았다. 빠져나간 자리는 왼팔 안쪽이었고, 그쪽에서 나간 것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소하는 손가락 둘을 펴서 무명 쪽으로 들었다. 무명의 눈이 펴진 손가락에 멎었다가 제 손바닥으로 내려갔다.
"나는 세지 않소. 가까운 것만 아오. 한 자리요." 무명이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질렀다. "나는 여섯 해 동안 발밑에서 소리가 난 것만 세어 놓고 그것을 남은 널이라 불렀소. 세는 것을 그만두니 그 다리가 아직 거기 있소."
소하는 다시 흙더미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눈을 뜬 채로 디뎠다. 발밑이 꺼지는 것을 보면서 꺼지는 만큼을 눈으로 정해버리면 그 크기로 굳고, 굳은 사이로는 뒤늦게 돌아오는 것이 끼어들 데가 없다.
굳었다. 되돌아오는 것도 없었다. 대신 결이 오지 않았다. 발바닥에 올라온 것은 흙이 한 뼘의 반쯤 내려앉았다는 것뿐이고, 그것이 어느 우물 쪽에서 내려앉은 것인지는 어디에도 실려 있지 않았다.
소하는 발을 빼고 흙더미 밖으로 내려섰다. 발가락 사이까지 들어온 흙이 식어 가면서 발바닥을 죄었다. 왼팔 안쪽이 두 번째로 비워졌고, 이번에는 비워지는 동안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걸러내려면 굳혀야 하고, 굳히면 가릴 것이 남지 않는다. 오늘 쓸 수 있는 셈은 처음 것뿐이었다.
여태 수가 어긋났을 때 틀린 쪽은 소하가 아니었다. 소하는 신을 꿰어 신고 제가 센 것을 쥔 채 담 안쪽으로 돌아섰다.
아침에 왼팔 안쪽을 짚자 위쪽이 스물이었다. 사흘 전에 스물넷이던 것이다. 아래쪽이 그 수에 한 칸까지 따라붙어 있었다.
손가락이 흰 면에 올라서자 셈이 끊겼다. 끊긴 자리 너머로 넘겨 보았으나 아래쪽은 올라오지 않았다. 다시 해도 같았고, 아침에 소하가 가진 아래쪽 수는 간밤에 발바닥으로 센 것뿐이었다.
관 마당에는 삽이 담에 기대어 서 있었다. 돌이 안 얹힌 자리는 여남은에서 더 줄어 있었고, 소하는 막는 선이 서기 전에 안으로 들어섰다.
소하는 기록관 앞에 서서 오른손을 들었다. 손가락 둘을 펴 보이고, 그 손을 마당 바깥쪽 흙더미 쪽으로 돌렸다. 편 손가락이 펴진 채로 있는지는 손끝으로 알 수 없었다. 서른을 세고서야 둘째 마디가 당겨지는 느낌이 올라왔고, 그때 보니 첫째 손가락이 반쯤 접혀 있었다. 소하는 왼손으로 그것을 밀어 세웠다.
기록관의 눈이 펴진 두 손가락에서 밤에 발을 디뎠던 흙더미 쪽으로 옮겨 갔다.
기록관이 서판을 펴 들고 왔다. 그는 소하의 얼굴 쪽으로 눈을 올리지 않고 금만 보았다. 못끝이 서판 위를 내려가다 멎었고 거기에 짧은 홈이 났다. "간밤에 둘입니다."
은실 세 줄이 메운 돌 옆에 서 있었다. 소하는 그 사람의 턱이 그늘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입가를 받았다. "어제는 밤에 끊긴 둘로 갈음했습니다. 오늘도 둘이면 갈음할 것이 아니라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소하의 오른손이 저도 모르게 내려갔다. 편 것을 도로 접으면 아직 무를 수 있었다. 그런데 수는 이미 서판에 올라가 있었고, 서판의 것은 소하의 젖은 왼손이 닿아야 없어지며 오늘 그 손은 마른 채였다.
은실 세 줄은 메운 자리들을 눈으로 훑어 내려갔다. "오늘은 미루지 않습니다. 셋을 끊습니다."
삽이 맨 앞 자리로 갔다. 소하가 그쪽으로 몸을 돌리자 삽 든 사람들이 사이로 들어섰고, 소하는 가장자리까지 밀려났다.
삽이 맨 앞 흙을 떠낼 때 은실 세 줄이 멎었다. 소매 끝을 쥔 손이 쥔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숨이 길게 들어갔다 나오는 동안 아무 데도 보지 않았다.
그 사람이 소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하는 턱이 돌아오는 속도에 눈을 맞췄다. "쉰넷을 두 번 세었습니다. 두 번째가 적었고, 적은 쪽을 제가 적어 올렸습니다." 숨을 고르는 동안에도 그 얼굴은 소하 쪽에 그대로 있었다. "모아 두면 저쪽이 한 번에 가져갈 자리가 된다는 것은 압니다. 그것도 제가 적었습니다."
삽이 흙에 들어갔다.
맨 앞 자리가 끊겼다. 삽이 다음 자리로 옮겨 가는 동안 소하는 가장자리에 앉아 왼팔 안쪽을 짚었다.
흰 면을 지나는 동안 셈이 또 끊겼는데, 이번에는 끊긴 자리 너머가 올라왔다. 받아 든 수는 소하가 셈해 둔 것보다 하나 많았다.
소하는 처음부터 다시 짚었다. 같았다. 간밤에 빠진 것이 둘이었다면 이 자리에 와 있을 수가 아니었다. 빠진 것은 하나였다.
발바닥으로 온 두 쌍 가운데 나중 것은 저쪽에서 처음 온 것이 아니었다. 소하가 왼팔로 흘려보낸 것이 한 박자 늦게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고, 끝이 조금 어긋났던 것은 돌아오는 길에 어긋난 것이었다. 소하는 그것을 새것으로 세어 하나를 더 얹었다.
다음 자리에 삽이 들어가 있었다. 소하는 일어나 막는 선 쪽으로 갔다. 삽 든 사람이 팔을 뻗기 전에 은실 세 줄이 먼저 그쪽을 보았고, 이번에는 팔이 내려가지 않았다.
소하는 손바닥을 들어 아래로 눌러 보였다. 그만두라는 뜻으로 쓸 수 있는 손짓은 그것뿐이었다. 기록관의 못끝은 서판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은실 세 줄은 삽 쪽을 보았다. 간밤에 둘이 빠졌다는 수를 마당에 가져온 것이 소하였다.
마지막 자리까지 가는 데 반나절이 걸리지 않았다.
소하는 제 셈을 처음부터 되짚었다.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보려면 머릿속에 오래 두었던 것들을 차례로 꺼내 맞춰 봐야 했다. 가장 오래된 것부터 꺼냈다.
우물은 열여덟 자였다. 소하는 줄을 쥐고 그보다 더 내려갔고, 아래에서 올라온 목소리가 둘 사이의 차를 되뇌었다. 그다음에 여울의 자 수가 넘어왔다. 제 줄이 끊어진 자리였다.
자리는 그대로 있었다. 수가 없었다.
소하는 그 자리를 다시 열었다. 줄로 내려간 자 수도, 두 사람 사이의 차도, 여울의 자 수도 올라오지 않았다. 열여덟이라는 우물 깊이만 남아 있었고 그것은 관 장부에도 적혀 있는 수였다.
관 기록에 없는 것이 그것들이었다. 적어 둔 데가 없어서 소하는 그날부터 그것을 머리로만 들고 다녔다. 세면 머릿속에 남고 남으면 흘러가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간밤에 흘려보내는 길이 커졌을 때 남아 있던 쪽도 같이 갔다.
실로 매듭을 지어 간수할 수는 없었다. 매듭은 다시 세는 순간 잊힌다. 못으로 새기면 관의 돌에 들어가고, 돌에 든 것은 소하 것이 아니게 된다.
소하는 오른손 끝을 젖은 흙에 대었다. 긋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가 떼었다.
삽이 마지막 자리에서 올라왔다. 마당에 돌이 안 얹힌 자리는 이제 손으로 꼽을 수 있었다.
해가 담 위로 내려앉을 무렵 기록관이 우물 턱 돌 앞에 섰다. 어제 새긴 줄 아래에 홈이 늘어 있었다. 소하는 그 앞을 지나가면서 파인 자리에 들어찬 저녁빛을 보았다.
소하는 마당 가장자리에 앉아 소매를 걷었다. 위쪽을 먼저 짚을까 하다가 아래쪽부터 짚어 내려갔다.
받아 든 수는 열여덟이었다. 어제 저물녘이 스물둘이었고 간밤에 하나, 낮에 셋이면 맞는 수였다.
소하는 손을 떼지 않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짚었다. 흰 면에서 또 끊겼고, 끊긴 데를 넘겨 받아 든 수는 열일곱이었다.
오른손 끝으로 왼팔을 눌러 자리를 표시해 두려 했으나 누른 느낌은 손을 뗀 뒤에 왔다. 서른둘을 세고서야 올라왔다.
소하는 손가락을 팔꿈치 안쪽에 도로 올려놓았다. 세 번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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