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히는 쪽
아직 어두울 때 소하는 품 안쪽을 더듬어 못을 꺼냈다. 날 끝이 옷을 긁지 않게 헝겊을 감아 두었던 것인데 밤새 그 헝겊이 풀려 손잡이 쪽으로 밀려 내려와 있었다. 다시 감고, 감은 자리를 손바닥으로 한참 눌러 보고, 품 안쪽 깊이 도로 밀어 넣었다.
손잡이 끝에서 옅은 녹내가 올라왔다. 그 냄새는 코로만 오지 않았다. 어젯밤부터 입 안이 말라 혀뿌리 쪽에 쇠 비슷한 것이 고여 있었고, 못을 쥐고 있는 동안 그것이 짙어졌다가 손을 뗀 뒤에도 가시지 않았다.
부뚜막의 물그릇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굴려 보았으나 고인 쪽은 물 밑으로 내려가지 않고 혀 위에 그대로 떠 있었다. 소하는 나머지를 마저 마시고 그릇을 엎어 두었다.
어머니가 등잔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소하의 품께에 눈이 잠깐 머물렀다가 떨어졌고, 그러고는 물두멍 쪽으로 턱을 들었다. "더 마시고 가라."
소하가 가진 것 가운데 글자가 되는 것은 그 못뿐이었다. 젖은 흙에 쓰면 손이 늦어 획이 서로를 밟았고, 허리끈의 매듭으로는 갈 수 있는 데까지가 정해져 있었다. 못자국만이 그어 놓은 자리에 그어 놓은 대로 남았다.
관 마당에 들어섰을 때 돌이 안 얹힌 자리들은 담 쪽 구석에 몰려 있었다. 어제까지 마당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이 끊길 때마다 한쪽으로 좁아졌고, 남은 것들은 이제 서로 어깨를 댈 만큼 가까웠다.
소하는 선 채로 그 자리들을 눈으로 세어 보다가 그만두고 왼팔 안쪽에 손가락을 올렸다. 위쪽이 먼저 왔다. 열일곱이었다. 어제 낮에 관이 끊은 셋이 거기 들어 있었다.
아래쪽은 열여덟이었다. 어제 저물녘에 받은 것과 같은 수였다. 밤 사이 따라 내려온 것이 한 자리도 없었다.
위쪽이 꺼지면 아래쪽은 반나절이나 하루 뒤에 따라 내려왔다. 어제 낮에 위에서 셋이 꺼졌으니 간밤이 그 뒤였다. 다시 짚어도 같은 수가 왔다. 같은 수가 거듭 온다고 맞는 수가 되지는 않는다.
기록관은 서판을 펴 들고 마당 가운데에 서 있었다. 은실 세 줄은 그 옆에서 담 쪽 구석을 보고 있었다. 둘 다 소하가 들어서는 것을 보았고 둘 다 그쪽으로 몸을 돌리지 않았다.
소하는 부름을 기다리지 않고 우물 턱 나무틀로 걸어가 품에서 못을 꺼냈다. "간밤에 없습니다." 획을 다 긋고 손을 뗀 뒤에도 못끝이 나무에 들었던 자리가 손에 오지 않아, 서른하나를 세는 동안 그 자리에 손을 얹고 있었다.
은실 세 줄이 몸을 돌려 그 자국을 끝까지 읽었다. 소하는 해가 드는 쪽으로 옮겨 서서 그 얼굴을 받았다. "어제 저 팔이 간밤에 둘이라 했습니다. 관은 거기에 하나를 더해 셋을 끊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간밤에는 한 자리도 안 빠졌습니다. 밤이 가져갈 것을 어제 낮에 미리 끊었다는 뜻입니다. 저 팔이 센 수가 맞았습니다."
소하는 그 말을 끊을 자리를 찾았다. 어제 제 셈이 틀렸다는 것을 새기려면 획이 여럿 들었고, 획이 길어지는 동안 관이 기다려 준 적은 없었다.
"오늘은 넷을 끊습니다." 은실 세 줄은 담 쪽 구석을 가리키지 않고 그 앞을 쓸어 보였다. "밤이 가져갈 몫까지 낮에 끊으면 밤에는 가져갈 것이 남지 않습니다."
기록관이 나무틀 앞으로 와서 그 자국을 제 서판에 옮겨 적었다. 적는 동안 소하 쪽으로는 돌아서지 않았다. 소하는 입 안의 것을 삼켰다. 목으로 넘어간 것은 물이고 남은 것은 쇠였다.
삽 든 사람들이 먼저 어제 끊은 자리들로 갔다. 밤 사이 메운 흙이 가운데부터 꺼져 있었고, 그들은 흙을 더 붓고 삽날 등으로 내려쳐 다지기 시작했다.
소하는 그 자리 가장자리에 발을 들여놓고 삽날이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에 발등을 두었다. 날이 어디서 멎을지는 날을 든 사람도 모르고 다져진 흙이 얼마나 단단한가에 달려 있었다.
소하는 고개를 담 쪽으로 돌렸다. 날과 발등 사이를 안 보려면 그 수밖에 없었고, 그러고도 날이 오는 때는 알아야 해서 날을 든 사람의 어깨만 곁눈에 두었다.
어깨가 떨어졌다. 날이 내려와 발등 위 한 뼘에서 흙을 쳤고 튄 흙가루가 발목 안쪽으로 들어왔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소하는 자리를 옮겨 남은 두 자리에서도 같은 데에 발을 두었다. 날은 거기서도 내려왔고 거기서도 조용했다.
발등에 흙이 눌리는 것은 왔다. 눌리는 것 말고는 아무 결도 묻어 오지 않았다. 흙은 움직였는데 그 움직임이 이쪽 것이 아니었다. 끊긴 자리는 좁히는 쪽도 좁혀지는 쪽도 저쪽에 있어서 소하가 발을 넣어도 끼일 데가 없었다.
발을 빼면서 소하는 어금니를 맞물렸다. 쇠 맛이 어금니 안쪽에서 올라와 입천장에 붙었다. 오른손 엄지로 턱을 훔치고 나서야 손끝이 살에 닿은 것을 알았다. 아침에 못자국을 짚고 세던 것보다 수가 늘어 있었다.
삽이 담 쪽 구석으로 옮겨 갔다. 돌이 안 얹힌 자리 가운데 맨 앞의 것이었고, 거기 흙은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아 발자국만 여러 겹 눌려 있었다.
소하는 그 자리 가장자리에 정강이를 댔다. 발등보다 날에 가까워 어깨를 곁눈에 둘 여유가 없었다. 언제 오는지 모르는 채로 대고 있어야 했고, 그동안 종아리가 저 혼자 떨렸다.
날이 흙을 갈랐다. 갈라진 흙이 양쪽으로 밀려 나오는 속도는 날을 밀어 넣는 팔에 달려 있었다. 흙이 정강이 쪽으로 올라오며 그 사이가 줄어드는 동안, 들어온 것은 뭉쳐 있었다.
여태는 둘을 받아 어느 쪽이 먼저인지를 갈랐다. 오늘 온 것은 갈라지지 않았다. 여러 결이 한 결로 묶여 한 덩이로 올라왔다.
소하는 정강이를 댄 채로 거듭 받았다. 묶인 자리는 풀리지 않았다. 낱낱이 안 세어지는 까닭은 이쪽 손에 있지 않았다. 저쪽이 그것들을 낱낱이 안 세고 있었다.
여태 밤에 빠진 자리들은 서로 떨어져 있었다. 한 밤에 둘이 빠져도 하나는 담 밑이고 하나는 마당 건너였다. 남은 것들이 담 쪽으로 몰려 어깨를 대고부터 저쪽은 그것들을 한 자리로 센다.
간밤에 안 빠진 것은 멈춘 것이 아니었다. 고인 것이었다.
고인 것은 한 자리 몫으로 한꺼번에 간다. 관이 세고 있는 남은 밤은 자리들이 흩어져 있던 때의 셈으로 얻은 수이고, 그 수는 오늘 아침 이전 어느 밤엔가 이미 쓸모가 없어져 있었다.
소하는 정강이를 뺐다. 무릎 아래가 제 것 같지 않아 몇 걸음은 발이 어디 있는지 눈으로 보고 디뎠다. 다리를 댔는데 더뎌진 쪽은 오른손이었다. 손가락을 폈다 쥐어 보니 쥔 것이 편 것보다 먼저 올라왔다.
몸을 세우며 소하는 은실 세 줄 쪽을 보았다. 그 사람은 삽이 들어간 자리를 보지 않고 그 뒤에 남은 자리들을 보고 있었다. 담 쪽으로 몰려 서로 어깨를 댄 자리들이었다.
모아 두면 저쪽이 어떻게 하는지를 관 장부에 적어 올린 사람이 그 자리들 앞에 서 있었다. 그 눈이 자리들에서 떠나 삽 쪽으로 돌아갔고, 삽은 그대로 들어갔다.
소하는 품으로 손을 넣었다. 나무틀까지 가면 새길 수 있었다. 몰린 것을 한 덩이로 센다는 말을 몇 획에 담을지 고르면서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록관이 길 가운데에 서 있었다. 서판을 펴 들었는데 글자가 든 면이 아래로 가 있었고 위로 온 면은 비어 있었다. 못끝이 소하의 왼쪽 소매를 가리켰다가 제 팔뚝 위를 한 번 쓸어 내렸다.
소하는 못을 쥔 손을 품에서 빼지 않았다. 기록관은 재촉하지 않고 서판을 든 채 기다렸다. 그 얼굴은 어제와 달리 소하 쪽에 그대로 있었다.
"몸에 난 것은 증거가 됩니다. 관이 그렇게 적었습니다." 해가 그 얼굴에 들어 말이 빠지는 데 없이 왔다. "적어 두고 세지는 않았습니다. 세지 않은 증거는 증거로 치지 않습니다."
소하는 왼쪽 소매를 걷었다. 팔 안쪽의 흰 면이 먼저 나왔다. 기록관은 손을 대지 않고 못끝으로 허공에서 그 자리를 짚었고, 짚을 때마다 서판 위에 짧은 획이 났다.
흰 면에서 하나. 팔뚝을 따라 올라가며 넷. 손목으로 내려와 붉은 골 두 줄에서 하나씩, 손끝에서 또 하나. 못끝은 자리마다 같은 길이만큼 머물렀다가 서판으로 돌아갔다.
오른손으로 넘어갔다. 손가락 뿌리에서 하나, 손등 엄지가 눌린 자리에서 하나, 손날에서 하나. 마지막에 못끝이 소하의 얼굴로 올라와 광대뼈 밑에서 멎었다.

소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못끝은 살에 닿지 않았고, 닿지 않는 그 거리에서 획이 다시 났다. 서판 위의 획을 세는 것은 소하가 아니었다.
기록관은 다 세고 나서 그 줄 끝에 날짜를 붙이고 서판을 접었다. 못끝이 접힌 서판 모서리를 짧게 긁었다. 어제 집 이름 아래에 홈을 낼 때 나던 것과 같은 자리였다.
그러고는 소하의 품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 못은 관의 것입니다. 미정이 쥐는 건 규정에 없습니다." 그날 이 못을 건네면서도 했던 말이었다. "그날은 손끝을 증거로 삼기로 해서 이 못을 그 뒤에 따르게 했습니다. 오늘 증거가 손끝에서 몸으로 옮겼으니 못도 그 뒤를 따릅니다."
소하는 못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힘이 들어간 것은 알았는데 얼마나 들어갔는지가 안 왔다. 기록관의 손가락이 손잡이를 잡고 당겼을 때 소하의 손은 이미 열려 있었고, 쥐고 있었다는 느낌만 빈 손바닥에 뒤늦게 올라왔다.
"재는 것은 관이 합니다." 그 목소리는 못을 건네던 날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 "재어지는 쪽이 쥘 것은 규정에 없습니다."
그는 못을 허리춤에 꽂고 삽 쪽으로 갔다. 녹내는 소하의 손바닥에 잠깐 남았다가 가셨다.
삽이 다음 자리로 옮겨 갔다. 소하는 품으로 손을 넣었다가 뺐다. 손이 들어가는 자리는 아침과 같았고 쥘 것만 없었다.
젖은 흙에 오른손 끝을 댔다. 획을 긋고 다음 획으로 넘어가자 앞의 획이 뭉개졌다. 손끝이 어디까지 갔는지가 늦게 오니 끝나기 전에 다음 것을 시작한 것이었다. 두 글자를 긋고 보니 뒷 글자가 앞 글자 위에 올라타 있었다. 소하는 손바닥으로 밀어 지웠다.
허리끈을 풀어 손가락에 걸었다. 하나는 응이고 둘은 아니다이고 셋은 어머니다. 넷째는 어머니 무릎에 밀어 놓은 실에 아직 뜻 없이 매달려 있고 그 손은 그것을 풀지 않았다. 몰린 자리를 저쪽이 한 덩이로 센다는 것을 가리키는 매듭은 거기 없었다.
적어 놓을 데가 없으면 머리로 들고 다녀야 한다. 소하는 오래 들고 있던 것이 있던 자리를 더듬었다. 자리는 그대로인데 안이 비어 있었다.
소하는 손바닥을 펴서 담 쪽 구석의 자리들을 한 줌으로 모아 쥐어 보였다. 은실 세 줄이 그 손을 보았고, 보고 나서 삽 쪽으로 돌아섰다. 관이 거기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저 팔이 또 무언가 하려 한다는 것뿐이었다.
삽이 네 자리를 다 떠냈을 때 담 그림자가 마당을 반쯤 건너와 있었다. 소하는 선 채로 왼팔 안쪽에 손가락을 올렸다. 아래쪽은 열넷이었다.
소하는 빈 품 안쪽을 더듬었다. 아침에 헝겊을 감아 두었던 자리에 손가락이 들어갔고, 거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손에 오기까지 서른셋이 들었다.
기록관이 우물 턱 돌 앞에서 서판의 것을 돌로 옮기고 있었다. 옮기는 줄에는 집 이름이 없었다. 돌에 드는 수는 관이 세어 온 수이고 관이 남은 밤을 꼽을 때 쓰는 수도 그것이다. 소하는 그 앞을 지나가면서 새로 난 홈을 세지 않았다.
두레박 바닥에 남은 물을 떠서 입에 머금었다가 뱉었다. 뱉은 자리에 쇠 맛은 그대로 있었다.
마당을 나오면서 소하는 나무틀 앞을 지났다. 아침에 새긴 자국이 그대로 있었고 그 아래는 비어 있었다. 담 쪽 구석의 자리들은 어깨를 댄 채였고, 무릎 아래는 아직도 제 것 같지 않았다.
문턱을 넘기 전에 소하는 오른손을 폈다. 손바닥 가운데에 못 손잡이가 눌렸던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소하는 거기에 왼손 엄지를 대고 한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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