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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성이 없어서 벽을 지납니다
    43화 · 2026년 10월 12일

    없는 자리

    등잔이 아직 켜져 있을 때 소하가 먼저 본 것은 어머니의 무릎이었다. 사흘 전 밤에 밀어 놓은 실이 거기 있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치마 주름 사이에 끼워 두고 잘 때도 빼지 않았고, 아침이면 다시 손가락에 걸어 쥐었다. 맨 끝의 고리는 지어진 채였다.

    소하는 그 실 끝에 손가락을 걸어 당겨 보았다. 실이 손가락 안쪽을 파고드는 것이 손에 올라올 때까지 소하는 당긴 채로 있었다. 서른둘이었다.

    어머니는 실을 빼앗지도 내주지도 않았다. 소하가 손가락을 풀자 그 손은 도로 주름 사이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문 쪽으로 턱을 들었다. "신 털고 나가라."

    왼팔 안쪽은 마당에 가기 전에 짚었다. 위쪽이 먼저 왔다. 열셋이었고, 어제 낮에 관이 끊은 넷이 거기서 빠져 있었다.

    손가락을 아래쪽으로 내려 보냈다. 흰 면에서 셈이 한 번 끊겼고, 끊긴 데를 넘겨 받아 든 것은 아홉이었다.

    소하는 손을 떼었다가 맨 위에서부터 다시 내려왔다. 아홉이 또 왔다. 어제 이 팔에 열넷이 들어 있었으니 간밤에 다섯이 없어진 것인데, 여태 한 밤에 가장 많이 간 것은 둘이었다. 어제 정강이로 받은 것이 낱낱이 안 갈리는 한 덩이였고, 그 덩이가 밤에 한 번에 갔다.

    소하는 위쪽을 다시 짚었다. 손가락이 어제 멎은 자리에서 또 멎었다. 올라가 처음부터 내려왔는데 또 거기였다. 아래쪽이 다섯을 가는 밤에 위쪽은 한 칸도 안 갔다. 소하는 짚던 손을 한참 떼지 못했다.

    마당에 들어서자 빛이 먼저 갈렸다. 돌이 안 얹힌 자리들은 어제처럼 담 쪽 구석에 어깨를 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몇은 흙이 검고 기름지게 번들거렸고 몇은 그렇지 않았다. 물기가 안쪽에서 빠져나간 흙은 잿빛으로 들떠 있었고, 아침 빛이 거기서만 가루처럼 흩어졌다.

    소하는 왼쪽 눈을 감고 담을 따라 걸었다. 그 눈을 뜨고 있으면 색이 안 오는 지가 오래다. 어깨를 댄 자리들 가운데 검게 번들거리는 쪽이 아직 많았고, 들뜬 것들은 끄트머리에 몰려 있었다.

    들뜬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묻어 오는 것은 가루였다. 쥐면 뭉쳐지지 않고 손금을 타고 흘러 내렸다. 마당 것만 세어서는 간밤의 다섯이 나오지 않는다. 왼팔이 세는 것은 은포의 우물들이고 마당은 그 가운데 몇 곳뿐인데, 두 쪽이 가리키는 데가 오늘은 같았다.

    이른 아침 관 마당. 흙으로 메우고 납작한 돌을 얹은 자리들이 담 아래에 줄지어 몰려 있고, 바닥은 검고 젖어 번들거리는 곳과 잿빛으로 마른 곳으로 갈려 있다. 해진 옷의 소하가 잿빛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오른손으로 마른 흙을 쓸어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고 있고, 멀리 우물 턱 돌 앞에서 검은 옷의 관 사람 둘이 서판을 펴 들고 서 있다
    간밤에 이미 간 자리는 흙 빛깔이 달랐고, 관은 그 색을 보지 않았다.

    기록관은 우물 턱 돌 앞에 있었고 서판이 펴져 있었다. 어제 저녁에 돌로 옮긴 줄이 거기 있었고 그 줄에는 집 이름이 없었다. 은실 세 줄은 서판 쪽으로 몸을 기울여 금들을 따라 내려갔다.

    "돌에 든 수로 셉니다." 그 사람은 서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늘은 둘입니다. 어느 둘인지는 제가 정합니다."

    못끝이 서판의 금들을 따라 내려가다 두 군데에서 멈췄다. 은실 세 줄이 그 두 금을 짚은 손가락을 그대로 담 쪽 구석으로 돌렸고, 삽 든 사람들이 가리킨 자리로 걸어갔다.

    소하가 본 것은 은실 세 줄이 고른 자리가 전부 들뜬 쪽이라는 것이었다. 눈을 돌려 다시 보았다. 잿빛이 맞았다.

    두레박 밑에 젖은 흙이 고여 있었다. 어제 거기 두 글자를 긋고 뒷 글자가 앞 글자 위에 올라타는 것을 보았다. 오늘은 손을 내리지 않았다.

    소하는 은실 세 줄 앞으로 가서 손바닥을 펴 검게 번들거리는 쪽을 쓸어 훑고, 그 손을 들뜬 자리 위에서 뒤집어 보였다. 손바닥이 하늘을 보고 있는지는 손끝에서 올라오지 않았다. 소하는 반대 손 손등으로 제 손목을 받쳐 각을 잡았다.

    은실 세 줄의 눈이 그 손에 잠깐 머물렀다가 삽 쪽으로 옮겨 갔다. 뒤집은 손바닥에 뜻을 넣는 약조는 관과 소하 사이에 없다.

    삽이 맨 앞 자리에 들어갔다. 떠낸 자리의 벽이 제 무게로 주저앉기 시작했다. 흙은 한꺼번에 쏟아지지 않고 윗녘부터 조금씩 밀려 내려와 구덩이 안쪽으로 모였다.

    소하는 가장자리에 엎드려 주저앉는 사면 안으로 무릎을 밀어 넣었다. 흙이 어디서 멎을지 소하는 몰랐고, 넣고 나서는 뺄 수도 없었다. 고개를 숙여 이마를 팔뚝에 붙였다. 그러면 보지 않아도 됐다.

    흙이 무릎 위로 올라왔다. 무릎 안쪽과 바깥쪽이 같이 죄였고 종아리까지 묻혔다. 조이는 것은 또렷하게 왔고, 그 뒤로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소하는 숨을 세며 기다렸다. 어제 끊긴 자리는 발을 들이밀 데가 없었다. 오늘은 무릎이 꽉 잡혔다. 양쪽에서 잡는데 잡는 쪽이 어디에도 없었다.

    무릎을 빼내자 흙이 무릎 모양대로 패인 채 남았다가 가장자리부터 다시 흘러 내렸다. 소하는 오른손으로 무릎의 흙을 털었다. 터는 손이 무릎에 닿는 것은 손을 뗀 뒤에 왔고, 아침에 실을 당기던 때보다 멀어져 있었다. 소하는 주저앉은 자리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흙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삽은 그 자리에서 반나절을 팠다. 떠낸 흙의 단면에 색이 층으로 섰다. 위에서 한 뼘까지가 잿빛이고 그 아래가 검은데, 검은 것도 햇빛에 나와 있는 동안 윗녘부터 들뜨기 시작했다.

    파 내려갈수록 삽에 실리는 것이 가벼워졌다. 인부들은 흙이 말라서 그런 줄 알고 물을 길어다 부었다. 부은 물은 들뜬 흙 위에 잠깐 얹혔다가 고이지 않고 아래로 빠졌다.

    소하는 왼팔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가 소매에 닿기 전에 멈췄다. 저기에 끊을 것이 남아 있었으면 흙이 검었을 것이다.

    삽이 자리를 옮겼다. 거기서도 날이 들어갔고 거기서도 단면이 잿빛으로 들렸다.

    은실 세 줄이 삽에서 눈을 떼고 소하 쪽으로 몸을 틀었다. 소하는 그 얼굴이 담 그늘에서 나오는 데까지 기다렸다. "돌에 든 수는 저 손끝이 세워 온 수입니다. 그 수로 오늘 자리를 골랐고, 삽은 두 번 다 빈 데를 팠습니다."

    그 사람의 손이 우물 턱 돌 쪽으로 갔다가 내려왔다. 삽도 삽을 든 팔도 어제와 다른 데가 없었다. "오늘 몫은 채웁니다. 자리는 다시 고르겠습니다."

    소하는 들뜬 흙을 한 줌 쥐어 그 사람 앞에 내밀었다. 손을 벌리자 가루가 손금을 타고 흘러 내렸다. 은실 세 줄이 본 것은 소하의 손이었다. 흙의 빛깔은 서판에 적을 자리가 없다.

    소하는 들뜬 두 자리 너머, 아직 검은 자리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삽 든 사람이 앞을 막았고, 몸을 비껴 지나가려 하자 어깨로 밀었다. 등이 담에 붙었다.

    그 사람은 어깨를 붙인 채로 체중을 실어 왔다. 소하는 턱을 가슴께로 내리고 눈꺼풀을 닫았다. 담돌의 모난 데가 등뼈 양쪽을 눌렀다.

    어깨가 더 들어왔다. 등과 담 사이에 남은 것이 줄어드는 동안 손바닥으로 들어온 것은 수였다.

    그 수는 아홉이 아니었다. 열셋도 아니었다. 세는 데 손가락이 얼마 들지 않았다.

    이쪽 셈으로는 아홉이 아직 서 있는데 저쪽은 그만큼으로 세고 있었다. 관이 꼽는 남은 밤은 그 수로는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

    위쪽이 어제 자리에 멈춰 선 까닭도 거기 있었다. 저쪽이 담 쪽 구석의 것들을 통째로 묶어 놓았으면 물이 닿은 자리부터 차례로 꺼뜨릴 일이 없다. 묶인 것은 차례를 안 지키고 통째로 간다.

    어깨가 빠지자 등이 담에서 떨어졌다. 눌렸던 데가 그제야 한꺼번에 올라왔다. 소하는 오른손을 등 뒤로 돌려 그 자리를 더듬었는데 손끝이 옷에 닿은 것도 뒤늦게 왔다. 세니 서른넷이었다.

    소하는 우물 턱 돌 앞으로 갔다. 거기 새겨진 줄이 있다. 오늘부로 이 손끝이 잰 것을 증거로 삼는다는 줄이고, 못으로 판 것이라 소하의 젖은 손 밑에서도 없어지지 않는다.

    은실 세 줄이 그 앞에 와 섰다. 기록관이 서판을 폈는데 못끝은 서판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 줄은 지우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울 수 있는 줄이 아니고, 지울 생각도 없습니다. 아래에 한 줄을 더 넣겠습니다."

    기록관의 못끝이 서판에서 떨어져 손 안으로 들어갔다. 그 손은 돌 쪽으로 가지 않았다. 은실 세 줄이 그쪽으로 손을 내밀었고, 기록관은 못을 건넨 뒤에도 서판을 접지 않았다.

    은실 세 줄이 못끝을 돌에 대었다. 획은 길지 않았다. "오늘부로 저 손끝이 잰 것은 참고로만 쓴다."

    관이 정한 것을 돌에 옮기는 일은 그가 해 왔다. 오늘은 정한 사람이 제 손으로 옮겼고, 기록관은 서판을 편 채 그 앞에 서 있었다. 새 줄이 다 날 때까지 그 서판에는 아무것도 나지 않았다.

    다 새기고 나서 은실 세 줄은 돌 위를 손바닥으로 쓸어 내렸다. 홈에 들어 있던 돌가루가 밀려 나오면서 글자의 테두리만 또렷해졌다.

    그 사람이 흙 묻은 소매를 코 가까이 들었다가 내렸다. "이 흙 앞에는 오래 서 있지 못합니다." 소매가 내려가는 동안에도 얼굴은 소하 쪽에 있었다. "줄을 쥐었던 넷이 어디서나 같이 옵니다. 흙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돌아섭니다."

    기록관이 못을 돌려받아 허리춤에 꽂았다. 꽂고 나서 서판을 들여다보았는데 오늘 날짜 아래로는 아직 아무 줄도 없었다. 그는 못을 다시 뽑지 않았다.

    소하는 못이 들어갔던 새 홈을 손끝으로 짚어 보았다. 짚은 것이 손에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손을 뗐다.

    삽이 멎은 것은 빛이 담 안쪽에서 다 빠진 뒤였다. 소하는 마당을 나오면서 파낸 흙더미를 지났다. 낮에 떠올린 단면이 식으면서 층이 더 또렷해져 있었고, 잿빛 켜가 아래로 한 뼘 더 내려와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 어머니가 등잔 밑에 앉아 있었다. 실은 그 손에 있었다. 오래 쥐고 있던 자리만 빛깔이 짙어져 있었고 끝엣 고리는 지어진 채였다.

    소하는 어머니 앞에 앉아 그 실을 받았다. 넷째 고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짚은 손을 들어 담 너머 관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그 손을 제 가슴으로 가져와 짚고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의 눈이 넷째 고리에 머물렀다. 소하는 다시 했다. 고리를 짚고, 담 너머를 가리키고, 제 가슴을 짚고, 고개를 젓는다. 세 번째에는 가리키기 전에 어머니가 먼저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어머니가 실을 받아 넷째 고리를 제 손가락에 걸었다. 그러고는 소하가 한 대로 담 너머를 가리켰다가 소하의 가슴을 짚고 고개를 저었다. 틀린 데가 없었다.

    소하는 실을 어머니 손에 도로 밀어 놓았다. 어머니는 받지 않고 소하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풀면 네가 다시 걸지 안 걸지 내가 모른다."

    어머니는 더 말하지 않고 실을 소하 쪽으로 밀었다. "걸어 둬라."

    소하는 넷째 고리를 손가락에 걸었다. 그 고리를 받을 수 있는 손은 이 방 안에 있고, 그 손은 관 마당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당 안에서 그것을 들어야 하는 사람은 오늘 제 손으로 돌에 줄을 새겼다. 소하는 고리를 건 채로 문 쪽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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