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기는 손
신을 신은 채로도 기울기는 왔다. 집을 나와 담 밖 길로 들어서자 신 바닥 한쪽에 몸이 더 실렸고, 그쪽으로 내딛는 걸음만 반 뼘씩 더 멀리 나갔다. 어제까지 이 길은 평평했다.
소하는 눈을 감고 담을 따라 걸어 보았다. 뜨고 걸을 때는 땅이 그냥 땅이었는데, 감으니 발바닥 바깥쪽이 먼저 눌리고 안쪽이 뒤따라 눌렸다. 기운 쪽 끝에 담이 있었다. 담 너머가 관 마당인 것은 눈을 떠서 알았다.
어머니가 문간에 나와 서 있었다. 소하가 돌아보자 치마에 손을 닦았다. "들어와서 한술 뜨고 가라."
소하는 들어가지 않고 허리끈에 감아 둔 실을 꺼내 넷째 고리를 손가락에 걸었다가 소매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어머니는 그 손을 보았고 더 부르지 않았다.
길가에 쪼그려 앉아 왼팔 안쪽에 손가락을 올렸다. 손가락이 살에 닿은 것은 서른셋을 세고서야 올라왔다. 위쪽이 먼저 왔다. 어제 손가락이 멎던 자리에서 오늘은 멎지 않고 쑥 내려갔다. 다섯이었다.
소하는 손을 떼고 맨 위에서부터 다시 내려왔다. 다섯이 또 왔다. 어제 이 팔에 열셋이 들어 있었다.
소하는 흰 면을 건너뛰고 팔꿈치 안쪽에 손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래쪽이 거기서 올라왔다. 아홉이었다. 어제 아침 이 자리에서 받은 것도 아홉이었고, 어제 낮에는 다시 짚지 않았다. 소매에 손이 닿기 전에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소하는 두 수를 나란히 놓고 한참 앉아 있었다. 앞서 가는 쪽이 하룻밤에 여덟을 잃었는데 뒤따르는 쪽이 한 자리도 안 간 밤은 여태 없었다. 소하는 일어서면서 손끝에 묻은 흙을 바지에 문질렀다.
마당에 들어서자 삽이 담 쪽으로 먼저 가 있었다. 돌이 안 얹힌 자리들은 어제보다 더 바짝 붙어 어깨를 겹치고 있었고, 그 앞 땅이 사람이 누울 만큼 꺼져 있었다.
은실 세 줄이 우물 턱 돌 앞에서 기록관의 서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소하는 그 앞으로 가 섰다. 고개를 든 얼굴에 아침 빛이 가득 들어 말이 하나도 안 흘렀다. "밤 사이 꺼진 자리가 없습니다. 어제 낮에 끊은 몫이 그대로 남았습니다."
"오늘은 셋을 끊습니다." 그 사람은 돌에 든 줄 가운데 맨 아래 것에 손을 올렸다가 뗐다. "자리는 돌에 든 수로 고릅니다. 어제 빈 데를 두 번 팠으니 오늘은 어제 고른 데를 빼고 고릅니다."
소하는 담 쪽 구석을 가리킨 손을 마당 건너편까지 길게 끌어다 놓고, 가리키던 자리로 손을 되돌려 그 위를 가로로 그었다. 손이 어디서 멈췄는지는 올라오지 않아, 그은 자리를 눈으로 더듬어 한 번 더 그었다.
은실 세 줄은 그 손이 멈출 때까지 보았다. 그러고는 돌 위의 아래 줄에 손가락을 올려 둔 채 삽에게 자리를 일렀다. 어제부터 저 손끝이 잰 것은 참고로만 쓴다.
소하는 가장자리로 물러나 발에 힘을 고르게 나누고 섰다. 몸이 담 쪽으로 쏠렸다. 쏠림이 끊기는 선은 가장자리에서 한 걸음 안쪽에 있었고, 그 선은 어제 눈으로 본 자리들의 줄과 맞지 않았다.
기록관이 서판에 오늘 날짜를 긋고 그 아래를 비워 두었다. 비워 둔 자리는 저 손끝이 세워 온 수가 들어가던 칸이고, 어제부터 그 칸은 채워지지 않는다.
삽이 맨 앞 자리에 들어갔다. 소하는 거기 묻힐 자리를 찾는 대신 마당을 나왔다.
담 모퉁이 그늘에 무명이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손등에 푸른 잎을 얹고 다른 손으로 누르고 있었는데, 씹은 자리에서 물이 배어 손목으로 흘렀다.
소하가 앞에 서자 무명이 고개를 들었다. 소하는 그늘 바깥으로 돌아 앉아 제 등으로 빛을 막지 않는 자리를 잡았다. "그 손에 흙이 없소." 무명이 잎을 누르던 손을 떼었다. "오늘은 아직 아무 데도 안 댔다는 말이오."
소하는 제 발 바깥쪽을 짚어 보이고, 그 손을 담 안쪽으로 돌렸다. 무명이 손바닥을 땅에 붙였다가 떼었다.
"가깝다 멀다로는 안 잡히오." 무명은 손바닥을 한 뼘 옆으로 옮겨 다시 붙였다가 뗐다. "짚을 때마다 다른 데가 나오오. 우리 쪽 땅은 기울면 기운 채로 굳는데 여기 땅은 밤새 제자리를 찾으려 드오. 그 이상은 모르오."
소하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무명이 받아 쥐었다. 한 손이었다.
눈꺼풀을 내렸다. 쥐는 힘이 조금씩 더해지는 동안 손등과 그 손바닥 사이에 남은 데가 줄었고, 얼마나 줄일지는 쥔 쪽이 정했다. 들어온 것은 하나였다. 결 하나가 왔다가 그걸로 끝났다.
여태 소하가 댄 것은 늘 한 군데였다. 마디도 손등도 한 번에 한 자리씩이었고, 정강이로 받은 것은 묶여서 안 갈렸고 발등으로는 아무것도 안 왔다. 한 군데로 대고 있으면 어디가 얼마나 가까운지까지만 온다.
소하는 손을 빼고 손가락 둘을 펴 보였다. 그러고는 무명의 두 손을 끌어다 제 오른손 양쪽에 하나씩 대어 놓고, 누르는 시늉을 손등으로 한 번 해 보였다.
무명의 눈이 펴진 손가락에서 제 두 손으로 내려갔다. "하나면 재는 것이고 둘이면 옮기는 것이오. 내가 전에 그 말을 했소." 손바닥이 제자리를 잡았다. "재는 일과 옮기는 일은 손이 하는 일이 다르오."
무명이 양쪽에서 눌러 왔다. 소하는 이마를 제 어깨에 붙였다. 누르는 두 손은 박자가 서로 어긋나 한쪽이 먼저 닿고 한쪽이 반 박자 늦게 닿았다.
둘이 들어왔다. 앞의 결은 담 쪽 구석의 것이었고, 뒤의 결은 그 덩이가 있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선후가 아니라 한 덩이가 통째로 자리를 뜨는 결이었다.
소하는 눌린 채로 거듭 받았다. 두 번 다 같았다. 저쪽은 담 밑의 것들을 재고 있지 않다. 이미 옮기는 중이고, 옮기는 동안은 세어 봐야 늘 같은 수가 나온다.
재고 있는 것과 옮기고 있는 것은 세면 수가 같다. 어제 위쪽이 자리에 멈춰 선 것도 오늘 아래쪽이 아홉에 선 것도 저쪽이 손을 놓아서가 아니었다. 옮기는 동안은 수가 안 줄고, 다 옮기고 나면 한꺼번에 준다.

손이 풀렸다. 소하는 제 손을 거두어 무릎에 놓았다. 눌렸던 데가 손등에 하얗게 남았다가 천천히 돌아왔고, 돌아오는 것이 눈에 다 보이고 나서야 눌렸다는 것이 손에 왔다.
소하는 어제 담에 눌린 등으로 받은 수만큼 손가락을 폈다. 편 것이 펴진 채로 있는지는 손끝에서 올라오지 않아, 왼손으로 하나씩 밀어 세우고 나서야 그 손을 무명 앞에 놓았다.
무명이 그 손을 한참 보았다. 그러고는 제 손을 같은 모양으로 펴서 소하 쪽으로 들었다. 끝까지 안 펴진 손가락까지 같았다.
소하는 그 손을 담 너머로 돌렸다가 무명의 입 앞에서 멈췄다.
"저 안에 들어가서 저 수를 말하라는 것이오." 무명의 얼굴이 통째로 빛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거기 든 적이 없소. 들면 적히오."
소하는 손을 내리지 않았다.
"우리 쪽에는 장부라는 것이 없소. 그래서 나는 이쪽 장부가 사람을 어떻게 붙드는지 여섯 해 동안 옆에서만 보았소." 무명이 옷깃을 왼쪽으로 고쳐 여몄다. "여섯 해 보고 나는 이렇게 알아들었소. 가려면 이쪽에 걸린 데가 하나도 없어야 하오. 나는 띠가 없고 적힌 데가 없어 여태 아무 데도 안 걸렸소."
소하는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이 쥘 것은 관이 거두어 갔고, 젖은 흙에 그은 글자는 뒷 글자가 앞 글자를 밟는다.
무명의 셈은 관 밖에 남은 하나뿐인 셈이고, 관 밖에 있었기 때문에 소하가 쓸 수 있었다. 들여보내면 그 셈은 관의 줄이 되고, 줄이 생긴 사람은 돌아갈 수 없다. 소하는 그 값을 세어 보고 있었다.
소하는 손을 내린 자리에서 다시 들어 무명의 입을 가리켰다.
무명이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잎이 손등에서 떨어졌는데 줍지 않았다. "묻겠소. 저 수가 맞소?"
소하는 손가락을 아까와 같은 모양으로 한 번 더 펴 보였다. 이번에도 왼손으로 하나씩 밀어 세워야 했다.
무명이 마당으로 들어서자 삽 든 사람이 가로막았다. 무명은 서지도 비키지도 않고 그 사람 어깨 너머 우물 턱 돌 쪽을 보았다.
은실 세 줄이 서판에서 눈을 들었다. 가로막은 사람이 옆으로 비켰다. 소하는 담 안쪽 가장자리까지만 들어가 섰고, 거기서 발밑이 담 쪽으로 기운 것을 받았다.
무명이 돌 앞에 서서 한 손을 폈다. 받은 그대로여서 손가락이 다 펴지지 않았다. "저쪽이 담 밑의 것을 세는 수요. 이쪽 수가 아니오."
기록관이 서판을 고쳐 들었다. "띠가 없습니다. 어느 계도 아니고 관 장부에도 없습니다." 못끝이 서판 위에서 자리를 못 잡고 제자리를 돌았다. "적을 칸이 없습니다."
"칸을 내십시오." 은실 세 줄은 무명의 옷깃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민 쪽이 반대입니다. 그것부터 적으십시오."
못끝이 서판에 내려갔다. 획이 났다. 소하는 그 획이 나는 동안 숨을 세었고, 획은 하나로 그치지 않고 줄이 되었다.
기록관이 고개를 들었다. "적었습니다. 오늘 날짜로 들어갔습니다."
은실 세 줄이 돌 쪽으로 돌아섰다. 돌을 보기만 하고 손은 대지 않았다. "밤을 꼽던 셈은 버립니다. 다시 셉니다." 삽 쪽으로 턱을 들었다. "오늘 몫은 여기서 멈춥니다."
삽이 흙에서 빠져 담에 기대어졌다. 맨 앞 자리는 반쯤 파인 채로 남았다. 마당에서 소리가 사라진 것은 소하에게 오지 않았고, 사람들이 서로 쳐다보다 연장을 내려놓는 것만 보였다.
기록관이 서판을 접고 무명 쪽으로 돌아섰다. "적힌 사람은 관이 데리고 있습니다. 규정에 있습니다." 말을 할 때 그 사람은 늘 소하가 설 자리를 한 번 보고 시작한다. 오늘도 그랬다. "그리고 적힌 줄은 지우지 않습니다. 관은 적는 뎁니다."
소하가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삽 든 사람이 앞을 막았다. 어제까지 그 선은 소하 앞에 섰는데 오늘은 무명 앞에 서 있었고, 소하는 그 선 바깥에 있었다.
소하는 선 너머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무명은 두 손을 옷자락 안으로 넣었다. 그 안에서 손이 포개지는 것이 옷 위로 비쳤다.
"이쪽에 걸린 데가 생기면 저 손 사이에 당신을 끼울 수 없소." 무명이 돌아서기 전에 소하 쪽으로 반 걸음 더 들어와 얼굴을 빛에 놓았다. "오늘 것은 내가 옮겼소. 다음은 모르오."
관 사람들이 양쪽에 붙었다. 무명은 끌려가지 않고 제 걸음으로 걸었고, 안채 문턱을 넘을 때 옷깃 왼쪽이 마지막으로 보였다.
소하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손이 옆구리에 닿은 것은 서른여섯을 세고서야 올라왔다.
마당 돌에 그늘이 다 덮이고 나서 소하는 담 모퉁이로 나왔다. 무릎 세우고 앉았던 자국이 땅에 남아 있었고, 씹다 버린 잎이 그 옆에 말라 있었다.
소하는 눈을 감고 그 자리에 섰다. 길에서부터 발바닥을 밀어 올리던 기울기가 여기서 끊겼다. 눌려 다져진 한 뼘만 수평이었고, 그 밖은 전부 담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소하는 그 한 뼘 위에서 몸을 고쳐 세웠다. 양발에 같은 무게가 실렸다. 그러고 섰는 동안 마당 쪽에서 삽을 담에 세워 두고 가는 떨림이 발바닥으로 올라왔고, 그 떨림을 받아 줄 손은 이제 담 안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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